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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두영 Sep 10. 2019

BOG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두통이 시작됐다. 다른 바이어들은 조언했다. 그곳에 가면 공항에 내리자마자 약국에 들려 휴대용 산소탱크를 사두는 게 좋을 거라고. 물론 인정한다. 이 조언을 우스갯소리로 넘긴 것은 큰 잘못이었다.

공항을 빠져나오는데 조금만 걸어도 어지러웠다. 보폭이 눈에 띄게 줄었다. 바이어 차에 몸을 싣고 달리는 도로는 아스팔트가 아니었다. 비포장도로를 달릴수록 두통은 점점 더 심해졌다.

2년 전 방문했던 해발 4000m의 볼리비아의 수도 라파스에서의 일화다.

오전 미팅은 겨우 버텼다. 고산병에 코카콜라의 원료라는 코카잎으로 달인 차(tea)가 좋다고 하여 바이어 사무실에서 미친 듯이 마셔댔다.

점심식사로 먹은 뷔페요리는 거의 소화가 안됐다. 몸이 너무 높은 곳에 있으면 음식을 위장까지 내려보내는 중력마저도 거부할 수 있나. 오후 미팅 중 3시가 안돼 미팅을 포기했다. 더는 견딜 수 없어 호텔로 돌아왔다.

죽기 전에 한 번은 에베레스트도 올라야지 했다. 사진을 좋아하는 내가 죽기 전에 남기고픈 설경 아니겠나. 라파스를 다녀와서 이 막연한 목표도 깔끔하게 포기했다. 설경은 한국에서도 찍을 수 있다.

아직도 이해가 안 된다. 왜 어떤 이는 고도가 높은 도시에 가도 잘 적응하는 반면 어떤 이는 미치도록 두통을 앓아야 하는가. 산소가 부족해 공기를 좀 쐴 요량으로 호텔방 창문을 열면 해발 4000m 높이의 공기는 영하 20도의 겨울처럼 얼어붙어 있었다. 이 도시는 어디에 가면 산소를 만날 수 있나.

두통을 해소하기 위해 잠을 청하면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어 잠을 잘 수가 없었다. 호텔방은 히터를 최고로 높이고도 추워 두꺼운 파카를 입은 채로 이불을 덮어야 했다. 왜 하필 호텔방은 9층에 있는가를 원망하며.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샤워를 하니 두통이 두꺼워지는 느낌이었다. 다른 도시를 향해 비행기 문이 닫히고 더 높은 고도로 이륙한 이후에야 두통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비행기 안의 산소가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우리나라 중남미 여행객들 사이에 손에 꼽히는 여행지인 우유니 사막은 해발 3600m다. 라파스와 비교해 400m밖에 차이 나지 않는다. 아직 가보지 못한 우유니도 깔끔하게 포기한다. 물론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도 가보겠다면 따라가겠다. 장엄한 광경을 바라보며 죽게 되더라도 사랑하는 사람 곁이라면 낭만적이겠지.

여기 콜롬비아 보고타는 해발 2640m다. 해발 4000m 라파스도 견뎌냈는데 이 정도쯤이야 하면서 좀 빠른 보폭으로 걷다 보면 여기도 살짝 어지러움이 느껴진다. 어쩌면 해발 2640m에서 사는 게 좋을 수도 있겠다. 너무 서두르지 말라고 좀 천천히 걸어가라고 누군가 귓속말로 얘기해주는 것 같다.

여기는 콜롬비아 보고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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