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지 말고
36개월까지는 가정 보육해라,
엄마 혼자 감당할 일이 아니다, 10개월 넘어가면 어린이집 보내도 된다.
아기에게 미디어 노출은 절대 하지 마라,
적당한 영상은 오히려 언어 발달에 도움이 된 것 같다.
한글은 6살 이전까지는 가르칠 필요 없다.
분리 수면이 아이의 독립심을 키우기에 좋다,
아니다 그 시기에는 엄마와의 애착이 제일 중요하다 등등…
삶의 모든 순간들이 그렇긴 하지만, 육아를 하며 느끼는 것은 육아야말로 a부터 z까지 온통 선택해야 하는 것들 투성이인 영역이라는 것이다. 대부분의 문제는 정답이 정해져 있기보다는 부모의 육아 가치관이나 아이의 기질에 따라 선택해야 하는 문제들로 느껴지지만, 또 어떤 것들은 비교적 정답이 정해져 있다고 생각되는 문제들도 있다. 하지만 그래도 쉽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인 게, 정답 앞에서도 그것을 따라 하는 것 자체가 힘들어서 고충이 따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문제 앞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의 고민은 필연적인 과정이 되곤 한다.
이제까지의 나도 나름대로의 크고 작은 선택들을 해오며 아이를 키워왔다. 어떤 부분에서는 양육자인 내가 조금 더 고생스럽더라도 아이에게 도움이 될 만한 선택들을 해왔고, 또 어떤 부분에서는 아이에게 조금은 안 좋은 영향이 미칠지 몰라도 일단 나부터 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이기적인 선택들을 하기도 했다.
이기적인 선택들을 하고 나면, 이를테면 하루에 2번 뽀로로를 틀어주는 것과 같은(좀더 수월하게 밥을 먹일 수 있어서 좋고 때로는 내가 휴식을 취하기 위해), 어김없이 자책이 되었다. 아이에게 좋은 엄마가 되어주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 그리고 이 생각은 꼭 이기적인 선택을 할 때뿐만이 아니고 마음 한 구석에 늘 자리 잡고 있었다. 왜 그런지 모르겠다. 생각해보면 아이를 위해 2년이나 휴직을 하고, 내 시간을 온통 아이를 위해 쏟고 있는데… 이유식도 10개월간 항상 정성으로 만들어 주었고 어떻게든 잘 먹이기 위해 애써왔는데. 아이에게 10번 사랑한다 말하고 끌어안고 뽀뽀를 퍼부으며 애정을 넘치게 표현했어도, 1번 화를 내면 그 1번이 목에 걸린 가시처럼 남았다. 그럴 때마다 아이에게 너무 미안해 눈물이 쏟아졌다. 미안해, 아까 엄마가 화내서 미안해. 너는 그냥 아기여서 그런 건데, 엄마가 부족해서 미안해.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이게 매번 그렇게까지 할 일인가? 싶기도 하다. 그럴 때마다 감정 소모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만약 친한 친구가 이 같은 일을 나에게 고백한다면, “야, 뭐 그런 걸로 그래? 다 그러고 살아! 화낼 수도 있지. 너무 그러지 마!”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교육에 있어서도 참 많은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처음 임신을 했을 때부터 지금까지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아이의 감정과 정서라서, 그와 관련한 책도 많이 읽고 나름대로 부모로서 어떻게 해야겠다는 믿음이 생겨났다. 하지만 공부에 대해서는 아직 한참 먼 일이기도 하고, 그저 남편과 나의 성향상 사교육을 많이 시키지는 않으리라, 공부는 부모가 시켜서 될 일이 아니고 스스로 의지가 있어야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문제는 이 신념 또한 한 번씩 흔들릴 때가 있다는 것이다.
어제는 6살 아이를 키우고 있는 친한 언니와 만났는데, 영어 유치원에 다닌 지 3년이 된 언니의 아이가 이제는 자신도 못 알아들을 정도의 스피킹과 리스닝이 되더라는 이야기에 갑자기 마음이 흔들렸다. ‘영어 유치원에 보내야 하나?’ 하는 고민보다는 ‘아이를 일반 유치원에 보냈을 때 내가 아이에게 더 좋은 환경을 주지 못한 것인가? 그것이 내 아이의 인생에 있어서 많은 것을 바꿀 것인가?’ 하는 고민이었다. 어차피 일반 유치원에 보내게 될 것이었다. 다만 머리만 조금 복잡해졌다. 또 대치동에서 아이를 키우며 아이에게 좋은 환경을 제공하고 있는 언니를 보고, 또 한 번 비슷한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해지기도 했다. 나도 대치동 학원가에서 3년, 학교에서 2년을 아이들과 함께 일해본 바 있다. 모든 아이들이 눈빛을 반짝반짝 빛내며 수업에 몰입하고, 무엇보다 학습에의 의지가 있어 더 깊이 알려달라고 조르며 배움 자체를 즐거워할 줄 알고 모든 것에 열정적으로 참여하던 모습이 나한테는 꽤 신선한 충격으로 남았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스마트폰보다는 2G 폰을 쓰고 있는 것도 충격이었다. 왜 스마트폰 안 쓰냐는 나의 질문에, ‘스스로 자제가 잘 안 돼서요’ 그런 대답이 돌아왔다. 부모의 강요가 아니었다. 주변의 친구들이 대부분 노력의 가치를 알고 매사 성실하게 살아가다보니, 자연스럽게 아이들 사이에서는 그런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이들은 대체로 예의가 매우 바른 편이었다. 그저 삭막한 줄로만 알았던 이곳이 생각보다 아이들에게 여러 가지로 좋은 환경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으로 바뀐 계기가 되었던 시간이다. 어차피 우리 부부가 그곳에서 살 일은 없다. 꼭 그것을 꿈꾸는 것만도 아니다. 다만, 나 하나만 생각했을 때는 이미 정립이 끝나도 한참 전에 끝난 가치관들이 이상하게 ‘육아’라는 영역 앞에만 서면 남들과 비교를 하며 다시금 ‘정말 이게 맞나? 이게 아이에게도 최선일까? 아이가 바라는 것도 정말 이것일까?’ 하는 의구심이 들고 혼란스러워지기도 하는 것이다.
지금 이 글도, 번잡한 내 생각만큼이나 어쩐지 번잡한 것 같다. 하지만 이번 글을 쓰면서 내가 정리하고자 한 마음은 지금까지 언급한 흔들림이 아니라, 엄마로서 보다 소신을 가져야겠다는 다짐이었다.
이제까지 살아오며 삶을 통해 배운 진리가 하나 있다. 어떤 것도 좋기만 한 것도, 나쁘기만 한 것도 없다는 것이다. 좋은 게 있으면 의외로 꼭 나쁜 것도 함께 있고, 나쁜 게 있어도 잘 지켜보면 그 안에는 꼭 좋은 것도 함께 있더라는 것. 그러니까 선택의 문제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어떤 선택도 좋기만 한 선택도, 나쁘기만 한 선택도, 따라서 유일하게 정답이라고 할 만한 선택도 없을 것이다. 그것만은 확실하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에서 고민 끝에 최선의 선택을 하고, 이미 한 선택들 앞에서는 더 이상 고민하지 않고 그 선택을 최고의 선택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다. 여기에 더해, 내가 잘 살고 있다고 믿는 약간의 뻔뻔한 태도도 가지면 좋겠다.
이 관점을 엄마로서의 나를 바라볼 때도 확장해보려고 한다. 나는 엄마로서 충분히 잘하고 있는 것도 많을 것이고, 또 부족한 부분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누구나 다 그렇게 살아간다. 내가 생각하는 ‘완벽한 엄마’란 거의 홀로그램 같은 이미지일 뿐, 현실적이지 않다. 따라서 그냥 나로서, 내 역량으로서 가능한 한 최고의 엄마가 된다면 그걸로 족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을 조금 편하게 바꿀 필요가 있다. 엄마로서 나의 부족을 발견하면 너무 자책하고 우울해하지 말고, 대신에 나는 이걸 더 잘하니까 이것만큼은 진짜 잘해보자, 그렇게 생각해보기로 한다.
‘아이가 잘 자랐다는 것’의 기준도 사실 정답이 없다.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좋은 대학을 갔다고, 좋은 직업을 가졌다고 해서 잘 자랐다고 단언할 수 있는 문제라면 차라리 쉽겠지만, 만약 아이가 좋은 대학을 가고 좋은 직업을 가졌음에도 행복의 역치가 너무 낮다거나 행복한 기억이 너무 없다거나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것이 힘들다면 잘 자랐다고 볼 수 없다고 생각한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남들이 보기에 좋은 무언가를 설령 하나도 갖지 못했더라도, 만약 아이가 태어나서 너무 좋고 살아가는 것이 행복하다고 느끼고, 하루하루를 즐기고 살 줄 아는 사람이라면?
나는 아이를 ‘어떤’ 사람으로 ‘잘’ 키울 것인가, 무엇을 진짜 유산으로 물려줄 것인가, 하는 문제도 계속해서 생각해봐야 하는 문제다.
아무튼 결론은 누가 뭐라고 하든, 누가 어떻게 살든 흔들리지 말고, 나는 나의 길을 뚜벅뚜벅 가자는 다짐을 끝으로 글을 마무리하고 싶다.
지금보다 소신 있는 엄마가 되어야겠다. :-)
나는 지금까지 잘해왔고, 잘하고 있고, 앞으로는 더 잘할 것이라고 믿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