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과 통찰-15
11월 4일(화),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이 주최한 '2025 과학기술산업화 포럼'에 다녀왔습니다. 2014년부터 4년간 한국연구재단 국책본부의 사업화 활동을 지원하는 역할을 수행한 적이 있고 그 후에도 가끔 비슷한 활동에 참여한 적이 있기에 여전히 관심을 갖고 있는 주제입니다. 이 행사를 통해 정부의 개략적인 AI 정책 방향, AI 전환(AX) 관련 현장 전문가들의 경험담, 그리고 KISTI가 개발 중인 AI 기반 산업화 분석 플랫폼 아폴로(Apollo) 등 여러 가지 유익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기에 관계자들께 감사하는 맘으로 돌아왔습니다.
다만, '기술산업화'라는 용어 자체가 내내 목에 걸린 가시처럼 삼키기 어려웠습니다. 인터넷 검색을 해 보니 언제부터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동안 '기술사업화'라고 부르던 것을 전임 장관의 소신에 따라 그렇게 바뀐 것으로 파악되는데 저의 짧은 소견으로는 다음 2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습니다.
첫째는 과거든 지금이든 '사업화'나 '산업화'를 '기술'에서 시작하는 것은 이제는 투자대비효과가 낮은 방식이라는 겁니다. ('과학'을 사업화, 산업화한다는 것은 AI 시대에 더더욱 중요해진 기초과학을 경시할 가능성이 크지만, 이건 이 글에서는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둘째는 사업화(: '특정 기업의 기술/제품을 시장에서 성공시키는 활동'으로 정의함)나 산업화(: 새로운 산업을 만드는 활동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함)는 혼자가 아닌 파트너들을 모으고 협업을 통해 성공 경험을 쌓을 때 비로소 완성된다는 겁니다.
우선, 기술에서 시작하는 방식의 문제점을 짚고자 합니다.
발표자 중 한 분인 블루포인트파트너스 이용관 대표이사는 '(사업화는) 신규성이 기준인 기술(technology)이 아니라 시장적합성이 기준인 문제(problem)에서 시작해야 한다'라고 하셨는데 전적으로 동감입니다.
기술 중심 R&D 결과물을 시장에 밀어 넣으려는 종래의 'Technology push' 방식은 시장 수요나 사회적 요구를 해결하기 위한 'Market(또는 Society) pull' 방식으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런 제 생각은 아래 브런치 스토리 글에서 이미 여러 차례 밝혔습니다.
- 공급자/생산자 관점 vs. 수요자/소비자 관점 (250511)
- 기술 중심 vs. 시장 중심 접근 (250601)
다음에, '산업화'를 추구한다면, 정책/전략의 목표와 초점은 개별 기업의 기술/제품이 아니라 다수 기업을 연결하고 협업을 통해 시장 창출에 성공하도록 지원하는 데 두어야 한다는 겁니다. 네트워킹 활성화, 협업 플랫폼 구축, 이를 위한 기술/경영 컨설팅 같은 것이 중요한 정책 수단이 되어야겠죠. 그런 이유에서 '산업화'를 '기술 중심' 접근방식으로 진행하다는 데 무척 답답해(?) 보였다는 겁니다. 이젠 누구나 다 공감하는 바겠지만, 상당히 오래전부터 경제 시스템은 기업 간 경쟁이 아니라 기업생태계간 경쟁으로 바뀌었고 이젠 소리 없는 국가 간 경제 전쟁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탁월한 기술/제품을 가진 일개 기업이 시장에서 성과를 내고 높은 기업가치로 평가받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장벽이 너무 많고 크다는 겁니다. 그걸 가능하게 해 주는 국가 차원의 혁신 시스템이 작동하는가 아닌가 가 진정한 의미의 '산업화'를 좌우하는 요인일 겁니다.
2015년 12월, 일개 스타트업으로 시작한 오픈AI는 10주년을 앞두고 있는 지금, 혁신적인 제품/서비스로 벌어 들이는 수입과는 비교도 안 되는 수준의 누적 적자를 안고 있는 가운데 엄청난 기업가치를 가진 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오픈AI는 단일 기업이 아니라 아래와 같이 AI 시스템 기술 스택 전체를 커버하는 생태계를 만들고 있습니다. 참고로, 그 이면에는 (우리나라와는 비교가 안 되는) 미국 테크기업들 간 인적 네트워크(예: '오픈AI 마피아')와 투자자들의 힘이 있습니다.
- 사용자 인터페이스: 자체 AI 브라우저인 Atlas
- 애플리케이션 : 의료/건강, 에듀테크, 미디어/콘텐츠, 정부/공공, 엔터테인먼트(성인물)
- 공통 서비스 : 개발자 도구, 워크플로우 자동화
- 파운데이션 모델 : LLM(언어), LVM(비전), LAM(행동), LWM(물리규칙)
- 컴퓨팅 인프라 : 데이터 관리/인프라 (: MS, 오라클 등 협력)
- 하드웨어 : AI 가속기 칩 확보 (: 엔비디아, AMD, 브로드컴 등 협력), AI 기반 소비자용 기기 (: 조니 아이브 협력, 메타 출신 인재 영입 등)
- 전력: 데이터 센터 확장, 원자력 에너지 도입, 정부 정책 유도, 1조 달러 규모의 데이터 센터 투자 계획 등
제가 확인, 검증할 수 없는 내용이지만 AI (퍼플렉시티)를 통해 분석해 본 바에 의하면, 위와 같은 혁신 활동을 아래와 같이 여러 가지 형태의 협업을 통해 진행하고 있습니다. (하드웨어, 전력 등은 포함 안 됨, 2025년 8월 기준)
- 제휴/협력 56% (27건)
- 투자/인큐베이팅 22.9% (11건)
- 자체개발 16.7% (8건): 모든 종류의 파운데이션 모델 포함
- M&A 4.2% (2건).
거의 모든 미국의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이 개별 기업이 아닌 공급 중심의 기술생태계와 수요 중심의 산업생태계를 구축, 운영하고 있는데.. 개별 기업의 기술/제품을 육성, 지원하는 정책/전략으로 그들과 경쟁할 수 있을까요?
서울대 창업 동아리 출신들이 2013년에 창업한 '수아랩'이라는 회사가 있었습니다. 국내/외 여러 기관의 투자를 받았고 정부 지원 프로그램인 TIPS를 통해 빠르게 성장했습니다. 그런 성장의 원동력은 첫째, 우수한 기술과 제품에 있었습니다. 산업 현장에서 디스플레이, 태양광, PCB, 필름, 반도체 등 양산 제품을 肉眼으로 불량 검사하던 방식을 자동화 한 딥러닝 기반, 머신 비전 솔루션을 개발, 판매한 거죠. 그것을 삼성, LG, 한화, SK 등 국내 top-tier 제조회사에 납품하고 해외 시장에도 진출했습니다. 둘째, 젊지만, 기술을 아는 CEO와 경영을 아는 경영진이 경영관리 측면의 혁신도 잘해 냈다는 거죠. 예를 들면, 딥러닝 모델을 훈련시킬 때 이미지 데이터뿐만 아니라 현장의 노련한 시니어 엔지니어들의 자문을 받아서 살아있는 지식/경험을 사업 운영과 제품 개발에 반영했다는 겁니다.
그러나, 그런 혁신 기업은 2019년 10월, 미국 코그넥스사가 2,300억 원이라는 매우 큰 금액으로 M&A 함으로써 '남의 회사'가 됐습니다. 이런 사례에서 정책 담당자나 기업 경영진은 뭘 생각해야 할까요? 국내에서 육성한 스타트업이 세계 수준의 기업으로 발전한 것은 해당 기업의 임직원이나 이를 지원한 정부/기관 모두에게 귀중한 성과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부 산업 정책의 목표 자체가 '내 자식 키워서 외국에 양자로 보내는 것'은 아니어야겠죠?
KAIST 윤태성 교수님이 2025년 2월 2일 자 '요즘IT'에 기고한 글(제목: 10년 전 CES 최고혁신상 수상 기업들은 지금 어떻게 지낼까)에 의하면 10년 전 CES 2015에서 혁신상을 수상했던 기업 중에서 글로벌 기업 9개를 제외하고 16개 기업을 조사했더니 10개 사는 아예 종적을 감췄거나 활동 기록이 없고 2개 기업은 M&A 되었으며, 4개 기업만 여전히 활동 중인 걸로 나타났답니다.
끝으로 사소한 듯 보이지만 중요한 문제를 하나 더 짚고자 합니다. '기술사업화'라는 용어를 '기술산업화'로 바꿀 때는 정확한 목표와 전략의 재설정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기술'이 붙는 순간 개별 기업/제품에서 출발해서 (낮은 확률로) 시장에서 성공하고 (소수의 기업끼리 운영하는 폐쇄된) 생태계를 만든다는 의미 내지 결과가 됩니다. 구체적이고 명확한 현장 문제에서 시작해서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산업생태계를 설계하고 그걸 뒷받침할 수 있는 기술생태계를 만드는 작업, 또 생태계 참여자 간에 진정한 협업이 이루어지도록 유도하는 작업 등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정부가 추진 중인 '개방형 생태계' 또는 '오픈 이노베이션'을 표방한 여러 가지 사업들 중에 성공 사례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례가 더 많다고 보면, 그런 장애물(예: 정부 주도, 신뢰 부족 등)을 걷어 내는 작업을 얘기하는 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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