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의 불꽃

by 울림

법적 조치 예고장은 종이 한 장의 무게가 아니었다.

그것은 루미에르라는 작은 성을 무너뜨리기 위해 날아온 거대한 공성퇴였다.

“계좌 가압류부터 들어올 겁니다.” 루미에르의 자문을 맡은 변호사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정원그룹 같은 대기업을 상대로 계약 위반 소송이 시작되면,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회사가 먼저 말라 죽어요. 지윤 씨 개인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도 포함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지윤은 마른침을 삼켰다. 자신의 이름 석 자가 법정에 오르내리고, 평생 갚지 못할 빚더미에 앉을 수도 있다는 공포가 엄습했다. 하지만 그 공포보다 더 깊은 곳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다.

“대표님, 정말 방법이 없을까요?” 강태하는 대답 대신 책상 위에 놓인 사직서 한 장을 지윤에게 밀어냈다. 지윤의 눈이 커졌다.

“지윤 씨, 지금 사표 써요. 그리고 이 모든 건 지윤 씨가 독단적으로 한 일이라고 말해요. 그러면 최소한 회사는 살릴 수 있고, 나도 지윤 씨를 ‘해고된 직원’으로 만들어서 보호할 명분이 생겨.”

“...진심이세요?” “아니.” 태하가 굳은 표정을 풀고 쓴웃음을 지었다. “내 진심은, 이 사표를 찢어버리고 정원그룹 회장실 앞에 가서 그 문장을 확성기로 외치는 거야.”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하지. 그들은 자본으로 우리의 입을 막으려 할 거야. 문장을 죽이는 가장 쉬운 방법은 그 문장을 쓴 사람들을 사회적으로 매장시키는 거니까.”

지윤은 태하가 건넨 사직서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그것을 반으로 접어 자신의 주머니에 넣었다.

“안 쓸래요. 아니, 못 써요.” “지윤 씨.” “대표님이 그러셨죠. 문장은 종이가 아니라 사람들의 머릿속에 적히는 거라고. 이미 사람들의 마음속에 불이 붙기 시작했는데, 제가 여기서 도망치면 그 불은 그냥 연기가 되어 사라질 거예요.”

지윤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단호했다. 그녀는 가방에서 어젯밤 정리했던 노트를 꺼냈다. 유출된 기획안의 화려한 이미지들을 다 걷어내고, 오직 문장만이 남은 투박한 기획안이었다.

“광고주가 없으면 광고를 못 한다는 건 편견이에요. 우리가 하려는 건 물건을 파는 게 아니라 질문을 던지는 거잖아요.” 지윤이 태하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제안했다. “그 문장이 광고가 아니어도 좋습니까?”

태하의 눈빛이 흔들렸다. “...광고가 아니라면?” “캠페인이 아니라 ‘현상’으로 만드는 거예요. 정원그룹의 로고를 떼고, 화려한 영상미도 버리고,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원초적인 방법으로 묻는 거죠. 누구의 허락도 받지 않고.”

그날 이후, 서울 도심 곳곳에 이상한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값비싼 옥외 광고판이 아니었다. 버스 정류장의 낡은 벽면, 지하철 계단의 구석, 편의점 앞 유리창. 누군가 분필로 적어놓은 듯한, 혹은 작은 스티커로 붙여진 문장들이 나타났다.

[지금 당신은 어디에 서 있습니까?]

그 아래에는 정원그룹의 이름 대신 작은 QR코드가 하나 찍혀 있었다. 코드를 스캔하면 화려한 브랜드 홈페이지가 아닌, 익명의 사람들이 남긴 짧은 글들이 올라오는 단순한 게시판으로 연결되었다.

[편의점 야간 알바 중입니다. 유통기한 지난 삼각김밥을 먹으면서 이 글을 보네요. 내가 서 있는 곳이 여기였군요.] [강남 한복판 화려한 빌딩 32층에 서 있습니다. 그런데 왜 저는 낭떠러지에 서 있는 기분이 들까요?] [아이를 등원시키고 돌아오는 길, 육교 위에서 멈춰 섰습니다. 나는 엄마이기 전에 누구였을까 생각하게 되네요.]

누구의 통제도 받지 않는 메시지. 자본이 거세된 질문. 정원그룹은 당황했다. 자신들이 폐기하라고 명령한 문장이 정작 자신들의 손을 떠나 유령처럼 도시를 떠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법적 조치를 취하려 해도 주체를 찾기가 모호했다. 루미에르는 공식적으로 “우리가 한 일이 아니다”라고 발뺌했고(실제로 지윤과 새롬이 개인적인 퇴근 시간에 벌인 일이었다),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문장을 복제해 퍼뜨리기 시작했다.

정원그룹 마케팅 팀장은 루미에르 사무실로 들이닥쳤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당장 중단시키세요! 이건 명백한 계약 위반이고 업무 방해입니다!”

강태하는 여유롭게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대답했다. “팀장님, 저희는 캠페인을 중단했습니다. 정원그룹의 예산은 단 한 푼도 쓰지 않았고, 정원그룹의 이름도 쓰지 않았죠. 그런데 왜 이게 당신들의 문제라고 생각하십니까?”


“사람들이 다 정원그룹 광고라고 생각하잖아요!” “아니요. 사람들은 지금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게 두려우신 건가요?”

팀장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루미에르... 정말 끝까지 가보겠다는 거군요. 후회하게 해줄 겁니다.”

그가 폭풍처럼 빠져나간 뒤, 지윤은 휴대폰을 확인했다. 실시간 검색어 순위에 그 문장이 올라와 있었다. 그리고 그 뒤를 잇는 또 다른 키워드

#어디에_서_있나요_챌린지

문장은 이미 불꽃이 되어 번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불꽃은 정원그룹이 숨기고 싶어 했던 거대한 어둠, ‘신도시 개발 부지 강제 철거 논란’의 현장까지 비추기 시작했다.

그들이 그토록 이 문장을 두려워했던 진짜 이유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다음 화 예고] 문장이 비춘 곳에는 추악한 진실이 숨어 있었다. 정원그룹의 거대 비리가 수면 위로 떠오르며 지윤과 태하는 생존을 건 마지막 도박을 준비한다.

"진실은 광고보다 힘이 셉니다. 우리가 증명해야 할 건 바로 그거예요." "지윤 씨, 이 판은 이제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어."

멈출 수 없는 불길 속으로, 그들은 스스로 걸어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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