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3.21

@troyes

by dukbo

고등학교 2학년 겨울, 친구들은 거의 모두 조기 졸업이 확정된 상태였고 나는 3학년 진학이 확정된 상태였다 (과학고를 졸업했다.). 당시 SNS에서 익명 질문 링크가 유행했었는데, 조기 졸업이 확정된 친구들이 하교한 뒤 3학년에 진학하는 친구들끼리 정독실에서 공부하다가 심심해서 나도 해본 적이 있었다. 그 때 익명으로 받았던 글 중 아직까지 기억이 나는 것이 있는데, ‘애들 다 졸업하고 대학갈 생각에 들떠있는데 니가 오면 분위기 가라앉으니까 눈치껏 정독실 가서 공부나 해라’는 내용이었다. 솔직히 익명이었지만 누가 쓴 글인지 알 수 있었다. 누군가와 메신저나 sns에서 자주 대화하다보면 그 사람만의 습관이나 특징을 알 수 있다. 글을 보자마자 떠올랐던 사람은 그렇게 글만 봐도 누군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친했던 친구였다. 오해일 수도 있지만 당시 엄청난 확신을 가졌었다. 직접 얼굴을 보며 말을 했다면 장난으로 넘길 수도 있었겠지만, 익명으로 말을 했다는 것에서 진심이라고 느껴졌다.


글을 쓴 사람이 내가 생각했던 사람이든 아니든, 나와 친했던 친구가 나에게 그런 말을 했다는 생각에 큰 충격과 배신감을 받았었다. 피해의식일 수도 있지만 일단 한번 그런 생각이 드니까 잊혀지지 않았다. 그 후로 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굉장히 방어적인 자세를 취했던 것 같다.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왜 이 사람과 친해져야 하지?’, ‘굳이 이 사람과의 관계에 노력을 투자할 필요가 없다’라는 생각과 이미 친한 친구들을 보면서도 가끔 ‘얘도 나에게 배신감을 주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가졌다. 그러다보니 무슨 전쟁터에서 스파이를 골라내는 것마냥 혼자 속으로 ‘얘는 내 진짜 친구다, 얘는 내 진짜 친구가 아니다’라는 의미 없는 색출을 하기도 하였다. 확신이 들지 않으면 소극적인 자세로 대하다가 친구를 잃고 나중에 후회를 한 적도 꽤 있었다.


하지만 이런 자세가 잘못되었다고 생각을 하거나 고쳐야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영화를 보러 가고, 쉬는 날 혼자 방에 누워 뒹굴거리면서도 ‘난 이게 편하다’, ‘진짜 친구가 아닌 사람들이랑 시간을 보내느니 혼자 보내는 것이 낫다’라며 어느 정도의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확신이 오만한 착각이었다는 것을 말이 통하는 사람이 몇 명 없고, 그나마도 잘하지도 않는 영어로 겨우 대화를 해야만 하는 이곳에서 깨닫게 되었다. 보험이나 은행 등의 서류처리도 문제였지만, 생활이 더욱 큰 문제였다. 학교에서 집까지 혼자 30분 걸어와 텅 빈 방에서 혼자 캐리어를 정리하고 어딘지도,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는 마트에서 겨우 생활용품을 사와 사용방법도 모르는 주방에서 대충 저녁을 해결했던 첫날을 잊지 못한다. 처음 겪는 낯선 환경에서 느끼는 첫 외로움이었다.


4일을 그렇게 혼자 다녔다. 처음 학교에 와서 그 4일이 가장 힘들었다. 진심으로 한국에 돌아가고 싶었고 연락 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런 말을 했었다. 그래서 그 때 내가 혼자 다닌다고 먼저 말을 걸어주고 같이 집에 가자고 해주고 밥 먹자고 해준 형 누나들이 너무 고맙다. 그 이후 함께 다니고, 모여서 저녁과 맥주를 먹으며 얘기를 나누며 살갑고 따뜻하게, 그리고 친근하게 나를 대해준 덕분에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내가 누군가에게 다정하게 대해주는 것이 그 사람에게는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어떤 사람이 나에게 어떤 존재가 될지는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또한 사람 사이의 관계는 내가 단순하게 정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겪었던 일처럼, 이번에 겪은 일도 내 마음가짐 변화의 계기가 될 것 같다. 주변에 다정한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