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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ukbo Sep 05. 2022

2019.03.21

@troyes

고등학교 2학년 겨울, 친구들은 거의 모두 조기 졸업이 확정된 상태였고 나는 3학년 진학이 확정된 상태였다 (과학고를 졸업했다.). 당시 SNS에서 익명 질문 링크가 유행했었는데, 조기 졸업이 확정된 친구들이 하교한 뒤 3학년에 진학하는 친구들끼리 정독실에서 공부하다가 심심해서 나도 해본 적이 있었다. 그 때 익명으로 받았던 글 중 아직까지 기억이 나는 것이 있는데, ‘애들 다 졸업하고 대학갈 생각에 들떠있는데 니가 오면 분위기 가라앉으니까 눈치껏 정독실 가서 공부나 해라’는 내용이었다. 솔직히 익명이었지만 누가 쓴 글인지 알 수 있었다. 누군가와 메신저나 sns에서 자주 대화하다보면 그 사람만의 습관이나 특징을 알 수 있다. 글을 보자마자 떠올랐던 사람은 그렇게 글만 봐도 누군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친했던 친구였다. 오해일 수도 있지만 당시 엄청난 확신을 가졌었다. 직접 얼굴을 보며 말을 했다면 장난으로 넘길 수도 있었겠지만, 익명으로 말을 했다는 것에서 진심이라고 느껴졌다.


글을 쓴 사람이 내가 생각했던 사람이든 아니든, 나와 친했던 친구가 나에게 그런 말을 했다는 생각에 큰 충격과 배신감을 받았었다. 피해의식일 수도 있지만 일단 한번 그런 생각이 드니까 잊혀지지 않았다. 그 후로 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굉장히 방어적인 자세를 취했던 것 같다.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왜 이 사람과 친해져야 하지?’, ‘굳이 이 사람과의 관계에 노력을 투자할 필요가 없다’라는 생각과 이미 친한 친구들을 보면서도 가끔 ‘얘도 나에게 배신감을 주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가졌다. 그러다보니 무슨 전쟁터에서 스파이를 골라내는 것마냥 혼자 속으로 ‘얘는 내 진짜 친구다, 얘는 내 진짜 친구가 아니다’라는 의미 없는 색출을 하기도 하였다. 확신이 들지 않으면 소극적인 자세로 대하다가 친구를 잃고 나중에 후회를 한 적도 꽤 있었다.


하지만 이런 자세가 잘못되었다고 생각을 하거나 고쳐야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영화를 보러 가고, 쉬는 날 혼자 방에 누워 뒹굴거리면서도 ‘난 이게 편하다’, ‘진짜 친구가 아닌 사람들이랑 시간을 보내느니 혼자 보내는 것이 낫다’라며 어느 정도의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확신이 오만한 착각이었다는 것을 말이 통하는 사람이 몇 명 없고, 그나마도 잘하지도 않는 영어로 겨우 대화를 해야만 하는 이곳에서 깨닫게 되었다. 보험이나 은행 등의 서류처리도 문제였지만, 생활이 더욱 큰 문제였다. 학교에서 집까지 혼자 30분 걸어와 텅 빈 방에서 혼자 캐리어를 정리하고 어딘지도,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는 마트에서 겨우 생활용품을 사와 사용방법도 모르는 주방에서 대충 저녁을 해결했던 첫날을 잊지 못한다. 처음 겪는 낯선 환경에서 느끼는 첫 외로움이었다.


4일을 그렇게 혼자 다녔다. 처음 학교에 와서 그 4일이 가장 힘들었다. 진심으로 한국에 돌아가고 싶었고 연락 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런 말을 했었다. 그래서 그 때 내가 혼자 다닌다고 먼저 말을 걸어주고 같이 집에 가자고 해주고 밥 먹자고 해준 형 누나들이 너무 고맙다. 그 이후 함께 다니고, 모여서 저녁과 맥주를 먹으며 얘기를 나누며 살갑고 따뜻하게, 그리고 친근하게 나를 대해준 덕분에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내가 누군가에게 다정하게 대해주는 것이 그 사람에게는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어떤 사람이 나에게 어떤 존재가 될지는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또한 사람 사이의 관계는 내가 단순하게 정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겪었던 일처럼, 이번에 겪은 일도 내 마음가짐 변화의 계기가 될 것 같다. 주변에 다정한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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