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독립선언서에서 '인간의 3대 권리'로 생명(Life), 자유(Liberty), 행복추구(Pursuit of Happiness)를 들고 있지만, 생명이나 자유도 행복을 추구하는데 필수적으로 수반되어야 할 요소일 뿐이다. 40년 전 국가고시를 준비하느라 유신헌법을 달달 외운 적이 있었는데, 당시 헌법 조항 어느 곳에 '행복'에 대한 문구가 있었는지 기억에 없다.
지금의 대한민국 헌법은 제10조에,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여기서 '추구'라는 단어는 국어사전에 '추구(追求): [명사] 목적을 이룰 때까지 뒤좇아 구함'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따라서 행복이란 것이 단어의 어원이 포함하고 있는 의미처럼 우연히 얻어지는 것이든, 노력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든 간에, 인간이라면 누구나 구하고 싶어서 그 뒤를 열심히 쫓는 대상인 것이다.
헌법 제10조를 다시 보자.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잃으면 행복할 수가 없다는 논리에서 '행복'이라는 한 단어에 모든 의미가 귀결된다. 후반부에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라고 되어 있다. 즉, 국가는 행복(=인권)을 보장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명시했다. 이는 삶의 기본이 되는 최소한의 의식주를 제공하는 것을 포함해서 국가의 행위는 국민 개개인의 행복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해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
정치, 경제, 교육, 국방, 외교, 건강, 복지 등 국가의 모든 통치행위는 그 어느 것이 되었든 국민의 행복을 위한 것을 기본으로 하여야 한다. 성공하면 행복해지기 때문에 성공하려고 노력하는 것이고, 성공하기 위해 좋은 대학을 나와 좋은 직장을 가지려는 것이지, 성공하기 위해서 행복해진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성공하면 확률적으로 행복에 가까워질 거라는 믿음 때문에 내일의 행복을 위해 오늘의 행복을 저당 잡히고 사는 게 보통의 인생이지만, 만약 그 반대라면 아무도 내일을 위해 오늘을 희생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표현상으로는 본말이 전도된 그런 말이 안 되는 일들이 현실에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고 있다. 교육현장에서는 오로지 좋은 점수, 입시 경쟁, 명문 대학만 부추길 뿐, '행복'해지는 방법은 철저하게 외면하고 있다. 10명 모두가 경쟁에서 승리자가 될 수도, 사이좋게 모두 SKY에 갈 수도 없다. 오직 한두 명의 행복(승자)을 위해 나머지 대다수의 불행(패배자)을 방조하는 행위에 다름없다. 삶의 목적을 '행복'에 두는 교육이라면 있을 수 없는 노릇이다. 물론 이것이 한국만의 문제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국이 세계를 선도하는 리더가 되지 말라는 법도 없다.
행복의 반대말은 무엇일까? 모두가 아는 것처럼 불행은 정답이 아닐 수도 있다. 제퍼슨이 기초한 독립선언서에서 생명과 자유가 행복을 위한 필수품이듯, 대한민국 헌법 제10조에서 명시한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도 '행복을 위한 필수불가결 요소'다. 그러면 인간으로서 존엄과 가치가 억압되고, 생명과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 상태는 무얼까? 그것은 전쟁이다.
전쟁에서는 군인이 아닌 그 어떤 인간도 존엄과 가치는커녕 생명과 자유도 보장되지 않으며, '행복'이라는 개념은 한갓 사치품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행복'이라는 개념의 대척점은 불행이 아니라 '전쟁'이어야 한다. 이제 국가의 책무는 명확해진다. 인간 삶의 목적이 '행복'에 있다는 전제를 인정한다면, 국가의 모든 행위는 전쟁을 억제하고 방지하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이어야 한다. 내전이 벌어지고 있는 시리아나 아프리카를 돌아볼 필요도 없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1950년 6월 25일 같은 일은 다시는 이 땅에 있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 아니다. 우리의 소원이 통일인 것은 그래야만 전쟁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요, 다시는 1950년 6월 25일이 되풀이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다. 행복을 위한 성공이지, 성공을 위한 행복이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면 '우리의 소원은 평화'로 바뀌어야 한다. 궁극적인 목적은 '행복'이요, 이 땅에 전쟁이 다시는 발발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불변의 명제다.
금년 들어 북한의 두 번에 걸친 핵실험으로 남북 당국의 최고 책임자들이 누가 더 험한 말을 하는지 경쟁이라도 하는 듯 거친 말들을 쏟아내고 있다. 심지어 전생 불사론을 외치는 정치인들도 있다. 평양을 지도에서 삭제하겠다고 하자, '서울 불바다론'을 들고 나온다. 북한의 도발은 국제적으로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그렇게 막가파들처럼 무책임한 말싸움이나 하는 게 최선일까, 이제 겨우 32살의 철부지 김정은을 상대하는 방법이 같은 방식 밖에는 없는 걸까라는 의문이 든다. 혹시 국민의 행복추구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국가의 책무를 명시한 헌법 제10조를 위반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핵 개발의 핑계가 되고 있는 북미 간 휴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의 전환하자는 북한의 요구에 어떤 문제가 있어서 들어주지 못하는지에 대한 설명은 어느 당국자에게서도 들을 수 없다.
<후기>
본말이 전도되면 모순이 생깁니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마키아벨리즘은 인류사에 많은 비극을 초래했습니다.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하지 못합니다. 수단도 정당하지 않다면 목적이 아무리 훌륭하더라도 의미가 없습니다. 인생의 목적은 성공에 있지 않고 행복추구에 있다고 가르쳤다면, 서로 모르는 젊은이들이 펜션에 모여 번개탄을 피우지는 않았을 겁니다.
정치도 마찬가집니다. 목적을 명확히 설정하면 누가 옳은 것인지, 무엇이 잘못하는 정치인지 분명해집니다. 그 무엇도 사람보다 우선할 수는 없고, 그 어떤 가치도 사람의 행복보다 빛날 수는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