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감상평
박카스가 약인지 음료인지는 모르겠으나 약방에서 팔았으니 약으로 생각한다. 그 박카스를 처음 마셔 본 것은 중학교 입시를 보러 갔을 때다. 아마 1967년 12월이었을 거다. 아무튼 무척 추웠던 것만큼은 확실히 기억난다. 용산 남영동에 위치한 용산중학교 교문으로 들어가는 나를 붙잡아 세운 엄마는 어디를 다녀오더니 따끈한 박카스 병 두 개를 내밀었고, 나는 무슨 맛인지도 모르고 들이켰다. 그런 정성도 무색하게 낙방하고 말았으니, 나는 지금까지 박카스를 누가 주는 바람에 먹었을지언정, 피로회복을 위해 일부러 사 먹은 기억은 없다.
요즘은 광고를 볼 수 없지만 TV가 별로 없던 그 시절에 박카스 광고는 매시간 나왔고 “피로회복을 위해 동아제약 박카스D를 마시자!”라는 선전문구는, 박카스를 마시지 않는 내게도 각인되어 있다. “끼닛거리도 없는 집이 웬 놈의 박카스는 박스로 사다 마시고 지랄이랴?” 어릴 때 엄마가 남의 집 살림살이를 흉볼 때 충청도 사투리를 섞어 하던 말이다. 박카스(Bacchus)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인물로 주피터의 아들이자 주신(酒神)이기도 한데, 무슨 까닭으로 피로회복제 이름이 되었을까.
영화 ‘죽여주는 여자’에서 윤여정은 박카스와 함께 몸도 파는 65세 할머니 양미숙을 연기한다. 영화는 미숙이 동네 의원을 찾아가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의사로부터 임질을 진단받는다. 윤여정은 남산이나 파고다 공원에서 만나는 노인에게, 박카스를 권하며 “저랑 연애하실래요?”라는 말로 접근한다. 인생을 달관한 듯한, 희망이라고는 그림자도 찾을 수 없는 무표정 연기와 단조로운 억양의 목소리가 사실감을 높인다. 홀로 사는 남성 노인들에게 성욕 배출구 노릇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는 그녀는, 단골들에게 ‘죽여주는’ 서비스(?)로 명성이 자자하다.
수컷들은 젓가락 들 힘만 있어도 섹스를 생각한다던가.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그 단골(?)들은 젓가락 들 힘조차 상실하기도 하고, 방금 밥이나 약을 먹은 것을 잊고 또 먹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스스로 아무리 죽고 싶어도 죽을힘조차 없게 된 노인들, 대소변조차 자신의 힘으로 처리할 수 없는 노인들, 살아있는 순간 자체가 치욕인 노인들, 의무적으로 요양원을 방문한 자식과 손주들에게 사탕껍질보다 못한 취급을 받아도 아무런 대꾸도 못하는 노인들은, 병문안을 핑계로 단골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보려고 찾아온 미숙에게 마지막 부탁을 한다.
종로 뒷골목 여인숙 비좁은 방에서 노인들의 성욕 해소를 위해 '죽여주는 여자'가 되었던 미숙은, 단골들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 그들이 더 이상 수치스럽게 살고 싶지 않다는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서 또 한 번 '죽여주는 여자'가 된다.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하는 노인에게 약을 사다가 입에 넣어주고, 치매가 왔으나 움직일 수 있는 노인은 산에 같이 가서 절벽 밑으로 밀어 버린다. 윤여정의 입을 빌어 미숙은 우리에게 묻는다, 이렇게 사는 게 좋으냐고? 이렇게 살아도 저승보다 이승이 낫냐고? 누구도 쉽게 대답을 찾지 못해 침묵이 흐르는 순간, 미숙이 관객을 대신해 행동으로 답한다. 인간으로서 존엄을 지킬 수 없다면 죽는 게 훨씬 나을 수도 있다고.
시골에서 무작정 상경하여 공장에서 일하다가 미군을 상대하는 기지촌으로 흘러들어 젊음을 보냈던 미숙에게 남은 것은 몸뚱이 하나였다. 잠깐 동거했던 흑인병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젖 한 번 물려 보지 못하고 입양 보냈던 것이 그녀에게 유일한 한으로 남았을 뿐, 그래서 거리에서 헤매는 아이를 돌봐주고 자신보다 불쌍한 노인들을 돕고 싶었던 미숙이, 자신이 죽여준 단골 때문이 아니라, 죽음의 순간에 같이 있어 달라고 부탁하며 스스로 수면제를 먹고 자살한 단골 때문에 살인죄의 누명을 쓰고 감옥에서 죽는다는 모순으로 영화는 끝난다.
“경찰 아저씨, 혹시 봄 돼서 감방 가면 안 될까요? 제가 추위를 많이 타서. 도망 안 갈게요. 차라리 잘 됐지, 뭐! 어차피 양로원 갈 형편도 안 되고, 거기 가면 세끼 밥은 먹여주는 거잖아요. 요즘은 반찬이 뭐가 나오나? 올 겨울은 안 추웠으면 좋겠다!” 동행한 형사에게 말하는 건지, 혼잣말을 하는 것인지 그렇게 중얼거리며 잡혀가는 경찰차 안에서 담배연기를 맛있게 들이키는 미숙의 모습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어야 하는 죽음의 순간을 연기한 듯하다.
아무리 작은 희망도 욕심이 되고, 어떤 불평도 허락되지 않으며, 운명적으로 인간이라면 피할 수 없는 마지막 순간은,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평범한 진리를 실행하는 엄숙한 순간이기도 하다. 자신의 의지로 태어난 사람 없듯이, 자신의 의지로 죽음을 맞이하는 인간도 거의 없다. 여기서 '거의'라는 말은 영화처럼 자살하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협심증으로 갑자기 죽는 것은 용서될 듯싶다. 그러나 뇌졸중이나 치매로 인간의 존엄성을 잃은 채 삶을 이어가는 것은 끔찍하다. 차라리 ‘죽여주는 여자’가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자살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는 것이 개인적인 의견이다.
다만, 그렇게 되지 않으려고 찬 새벽에 나가 운동도 하고, 견디기 힘든 단식도 하며 발버둥 치고는 있다.
▼ 영화의 마지막 장면. 양공주로 산 사람이나 부귀영화를 누린 사람이나 평등해지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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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모처럼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영화를 감상했습니다. 앞으로 운명이 내게 남긴 시간이 얼마나 될까요? 암과 같은 치명적인 병에 걸리지 않는다면 2~30년 정도 남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알고 있는 친지들 가운데 89세로 운명한 외할머님과 90세까지 산 외삼촌이 비교적 장수한 분들이었고 부모님을 비롯해 대부분 단명했습니다. 아마 큰 변화 없이 이대로 지낼 것 같기는 합니다. 더 나아질 것도, 크게 나빠질 것도 없으니까요.
지난 시월 사위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죽을 때가 되면 자식들이 있는 미국으로 갈지 모르겠지만 그전까지는 한국에서 살 거라고. 그러나 그러더라도 너희를 찾아가지는 않을 거라고. 내가 생각하는 놈은 너희가 아니라고. 자식이 셋이나 있어 선택할 수 있는 것도 행복입니다,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