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극으로 풀어본 현실 속 충신과 간신
모든 사극(史劇)에 필연적으로 등장하는 인물이 충신과 간신이다. 극에서는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언급할 필요가 있다고 느끼지는 않지만, 이 둘의 차이를 굳이 생각해본다. 먼저, 사극에서 충신들이 하는 언행의 특징들로, 이밖에도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머리에 떠오르는 것만 나열해보면 이렇다.
- 자신이나 가정의 안위보다는 군주와 백성을 먼저 생각한다.
- 옳고 그른 것의 사리분별이 분명하여 임금이 듣기 싫어하더라도 직언을 서슴지 않는다.
- 신념과 소신이 쉽게 변하지 않으며, 이에 어긋나는 일은 추구하지 않는다.
- 솔직하고 책략이 부족해서 모함이나 누명에 약하다.
반면에 이와 반대되는 행태가 간신들의 특징이겠으나 이 또한 나열해보자.
- 군주와 백성이 어떻게 되던 일신의 영달과 가문의 광영이 중요하다.
- 옳고 그름에 관계없이 임금의 귀와 마음을 즐겁게 하는 감언이설에 능하다.
- 상황에 따라 신념을 쉽게 바꾸며, 일을 하는 데 있어 소신보다는 이해관계가 중요하다.
- 속마음을 쉽게 드러내지 않으며, 당리당략에 따른 모함이나 누명 씌우기를 잘한다.
삼국시대 이전을 배경으로 한 ‘주몽’에서부터 조선 후기를 무대로 한 가상극 ‘해를 품은 달’까지 사극에 등장하는 수많은 충신들과 간신들의 성격을 간단히 망라하기에는 부족할지 모르겠으나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불멸의 이순신’ 같은 사극 속에서 이순신 장군은 왜군을 무찌르는 데는 뛰어난 천재적 재능을 보이지만, 조정의 간신을 상대하는 데는 우둔하기가 이를 데 없다. 대표적 간신 원균은 그 반대다. 사극을 보면서 답답한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간신은 두뇌가 영특하게 회전하는데 반해, 충신은 답답할 만큼 머리가 둔하게 움직인다.
왜 그럴까? 왜 이순신 장군은 적을 상대할 때는 천재가 되면서 임금이나 조정을 상대할 때는 바보처럼 아둔할까? 그것은 충신이라면 고금을 막론하고 공통적으로 관통하는 신념 때문이다. ‘영광은 부하에게 돌리고, 잘못은 모두 내가 감수한다.(Glory passing, blame taking)’는 정신이다. 이랬기에 이순신 장군의 예하 장병들은 생명을 돌보지 않고 싸워서 이길 수 있었다. 이를 반대로 하면 바로 간신의 특징이 된다. 즉, ‘Glory taking, blame passing’이다. 이런 사람이 역사 속에만 있을까.
신입사원의 티를 채 벗지 못했던 시절, 나는 아무런 잘못도 없이 ‘견책’이라는 중징계를 받았던 경험이 있다. 잘못이라면 윗사람 지시로 감사관에게 위증을 한 것밖에 없었다. 그렇게 하면 실제로 잘못한 다른 직원은 ‘견책’에 해당하는 중징계를 면하고 나는 간단한 경징계로 끝난다는 게 위증을 시킨 윗사람의 핑계였다. 그러나 결과는 반대로 나왔고 윗사람은 아랫것(?)인 내게 어떤 사과도 하지 않았다. 대표적인 ‘Glory taking, blame passing’의 사례였으나, 그 후에도 이런 아류의 사람들은 정말 많이 만났다. 이 경험은 나중에 내가 부서의 장이 되었을 때 처신하는 방법에서 가장 중요한 교훈이 되었으며, 윗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었다.
공공연하게 ‘자기 PR 시대’라고 하는 요즘에는 이 논리가 시대착오적 발상이라는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없겠지만, 사회 지도자급 인사들에게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없다. ‘최순실-박근혜 게이트’로 시끄러운 요즘, 뉴스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들이 ‘Glory taking, blame passing’ 하는지, ‘Glory passing, blame taking’ 하는지 따져보면, 국가와 민족에게 이익이 되는지 해가 되는 사람인지 구분하는 것은 쉽다.
지난달 타계함으로써 역사 속의 인물이 된 쿠바의 독재자 ‘피델 카스트로’는, 어떤 동상도 세우지 말고, 어떤 우상화 시도도 하지 말라는 말을 유언으로 남겼다고 전한다. 반세기가 넘는 기간 동안 쿠바를 통치한 공산주의 독재자이지만, 영광(Glory)을 취하지 않으려 했다는 점에서, 그는 국리민복(國利民福)을 위한 방법과 노선이 틀렸을지언정 국가와 국민에게 충성한 인물로 기록될 것이 틀림없다. 반면에 김일성부터 김정은까지 3대에 걸쳐 우상화에 여념이 없는 김일성 일가는 인류사에 최악의 인물로 기록된다는 것에 의문이 있을 수 없다.
박근혜 대통령의 칠푼이 짓으로 명분이 많이 퇴색하기는 했어도, 내년 박정희 전 대통령 탄생 100주년을 맞아 1,400억이나 되는 예산이 동상 건립 등 전국 곳곳에서 시행하는 각종 사업을 위해 책정되었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다. 독재자였던 자신의 아버지를 우상화하는 일은 누구와 더 가까울까.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일까, 아니면 북한의 김정은일까. 그녀가 대통령이 되려 했던 가장 큰 이유가 국리민복이 아니라, 10·26 사건으로 땅바닥으로 추락한 박정희 대통령의 명예회복이었는지 모르겠다. 그렇지 않다면, 국민의 3분의 2가 반대하는 역사교과서 국정화 작업에 그렇게까지 몰두했을 리가 없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면, 왜 그렇게까지 ‘Glory taking’하려 했을까.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나 7시간을 끝내 밝히지 않는 것도, 그리고 MB정권의 민간인 사찰도 ‘Blame passing’하려는 노력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박정희 대통령 우상화나 MB정권의 4대 강 사업 자화자찬은 ‘Glory taking’하려는 시도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사극이 전하는 역사 속에서는 간신들의 행태와 차이가 없다. 충신과 간신 간에는 공통점도 있다. ‘국리민복’을 위한다는 그들의 한결같은 주장이다. 하지만 간신들의 주장은 자신의 속마음을 감추기 위한 책략에 불과할 뿐이다. 일신의 영달을 도모하는 속마음을 그대로 드러낼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남들도 자신과 같다고 생각하는 그들은 수치심도 없다.
사극에 등장하는 충신은 바보다. 속마음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바람에 모함당하기 일쑤고, 비난을 피할 의도도 없다(Blame taking). 숱한 고통과 끊임없는 수모를 당하고 모든 영광을 잃은 후에 비로소 상처뿐인 승리를 쟁취하며 드라마는 끝난다.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고, 거짓이 참을 몰아낼 수 없다는 메시지 전달과 함께.
작가의 상상력이 개입된 허구라 하더라도 역사를 배경으로 했다는 점에서 사극은 현실과 픽션의 중간에 위치한다고 하겠다. 사극에서 보았던 충신과 간신들의 모습이, 작금 사회와 나라의 지도자급 인물들에서 적나라하게 보이는 것이 그 증거다. 대통령이 탄핵되는 혼란의 시간에 수백만 시민이 든 촛불로 Glory만 taking 하고 blame은 passing 하려는 간신들을 찾아내 쫓아버리고 바로 잡는다면, 충신만 남은 대한민국이 밝은 미래로 나아가는 절호의 기회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