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족과 행복의 차이
지금까지 행복을 의식하며 살았던 적은 없다. 언제나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면 된다고 생각했을 뿐, 굳이 행복하기 위하여 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중고등학생 시절에는 무협지에 심취해서 숙제를 하지 않았거나 계획한 대로 공부하지 못하고 주말을 보내고 나면 다음 월요일 아침에 후회가 밀려왔고, 대학에 다닐 때는 바둑에 빠져서 방학 중 많은 시간을 기원에서 보내고 나서는 자책했다. 그러나 무협지와 바둑에 집중했던 시간만큼은, 시간이 언제 가는지도 모를 정도로 행복했다. 그게 원인이 되었을까, 내게 행복이란 후회나 자책감과 같은 의미였다. 그 기저에는 불쌍한 인생을 산 부모님을 실망시킬 수 없다는 다짐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친구와 부모님을 의식했던 한국에서와는 달리 미국에서는 가정과 회사 밖에 몰랐다. (한국에서는 토요일도 근무했으니까) 다소 길어진 주말에는 델라웨어 갭(뉴저지와 펜실베이니아 사이를 흐르는 강)과 포코너(뉴요커들에게 유명한 펜실베이니아 휴양지)로 나들이 다녔다. 금전적 여유가 생기면 이것저것 사러 다니는 재미도 쏠쏠했다. 전자기기를 구입하여 홈씨어터를 꾸미는 취미생활에도 열중했다. 종합 운동기구를 사다가 아래층에 조립해 놓았다. 대여섯 번이나 사용했을까. 자리만 차지해서 청소할 때 거추장스럽기만 하다가, 이사 갈 때는 녹이 잔뜩 스는 바람에 해체할 수가 없어서, 쇠톱으로 틀을 힘들게 절단해서 버려야 했다. 그만큼 아무 생각 없이 소유하기를 좋아했다. 홈데포나 코스트코에 가면 보는 것마다 필요한 이유가 생각났다.
최초의 행복에 대한 자각을 하게 된 계기는 미국 시민권을 공부였다. 행복추구(Pursuit of Happiness)가 생명(Life), 자유(Liberty)와 함께 미국 헌법이 보장하는 ‘인간의 3대 권리’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행복에 대한 개념이 새삼스러웠다. 행복을 위해 살았던 적이 과연 있었을까. 심지어는 평생을 같이할 결혼상대를 만나면서도, ‘엄마가 이 여자를 흡족해할까?’라는 질문이 앞섰다. 돌이켜보면 어처구니가 없을 만큼 그런 엉터리는 없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그게 옳은 일이라고 믿었다.
실직해서 경제적 능력이 없어진 것이 원인이 되어, 행복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을까. 행복에 집중하니 많은 것이 다르게 보였다. 행복에는 넓고 큰 집도 거추장스럽고, 언제 필요할지도 모를 이런저런 물건을 소유하는 것도 불편한 것이었다. 자기합리화라고 비난을 받아도 딱히 반박하기는 힘들지만 실제로 그렇게 느꼈다. 만족이 행복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만족하려고 했지, 행복하려고 들지 않았다는 자각이 생겼다. 좋은 집과 차는 만족감을 채워줄지언정 행복과는 거리가 멀었다. 행복을 주는 것은 물질이 아니라, 경험과 기억이었다.
최근에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인터넷 카페에서 만난 친구와 함께한 동남아 여행이었다. 가는 곳마다 난생처음인 곳이었고, 매일 낯선 사람과 체험을 만나며 새로운 순간들이 이어졌다. 요즘도 ‘세계테마기행’이나 ‘걸어서 세계 속으로’와 같은 여행 다큐를 보다가, 갔던 곳을 만나면 행복한 느낌이 되살아나 저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심지어 너무 더워 짜증이 심했던 방콕과 귀의 통증으로 밤을 지새웠던 치앙마이에서의 기억도 즐겁기만 했다. 더군다나 여행의 말미에는 말레이시아에 계시는 분의 초청으로 쿠알라룸푸르에서 흔치 않은 대접을 받았기에 더욱 좋은 기억으로 남았다. 아쉬웠던 점은 기간이 너무 짧았다는 것뿐이어서, 보다 넉넉하게 날짜를 잡아 다른 곳으로의 여행계획을 종종 상상하기도 한다.
이런 생각이 단지 부족한 인간의 자기변명이 아니라는 것을, 서울대 최인철 심리학 교수가 ‘나의 삶, 나의 행복’이라는 EBS 방송의 인문학 강의에서 학문적으로 증명해주었다.(증명이라는 단어는 무언가 부족한 느낌이다. 이때 정확한 표현은 'Endorsement'라는 영어 단어다.)
강의의 마지막 결론으로 교수는, 돈으로 행복을 극대화시키는 방법으로 ‘소유보다는 경험을 사라’고 조언했다. 사람에 따라 다 다른 행복의 개념을 단일화해서 정의할 수는 없다. 어떤 사람은 행복을 ‘자기가 하고픈 일을 하며 보람을 느끼는 것’이라고 하고, 또 다른 이는 ‘비전과 목표를 세우고 도달하는 과정’이라고 수준 높게 정의한다.
한때는 무협지가, 한때는 바둑이 최고의 행복을 주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금 내게 행복은, ‘반성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고 한 소크라테스의 말 때문이 아니라, 지난 과거를 조용히 반성하며 눈곱만큼이라도 가치 있는 삶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책을 읽고, 작은 깨침이라도 있으면 글로 옮기는 일을 금년에도 계속할 것이다.
행복해지기 위해서.
<후기>
고대 사람들에게 행복이란 ‘우연히 얻어지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Happy’의 어원은 ‘우연한 발생’의 뜻을 가진 ‘happ’으로 ‘happen’과 어원이 같습니다. ‘幸福’의 ‘幸’도 우연이라는 뜻이 있으니 동서양을 막론하고, 행복은 노력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질병이나 사고, 전쟁과 같은 피할 수 없는 일들이 자신과 가족에게 일어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성서의 말씀은 그리스도인에게만 한정되는 진리가 아니었던 거지요.
현대의 학문은 ‘행복도 노력에 의해 얻어질 수 있다’는 것으로 다르게 해석합니다. 전통적인 의미의 행복이란 고통을 줄이고 쾌락을 키움으로써 얻어진다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쾌락은 순간으로 끝나는 것이고, 또 같은 쾌락을 반복하기 위해서는 그 강도가 점점 세져야만 합니다. 따라서 나이가 들수록 감각적인 쾌락보다는 ‘의미’에 더 행복을 느낀다는 것이 증명된 사실입니다. 즉, ‘의미가 없는 즐거움’보다는 ‘즐거움이 없는 의미’에서 오는 행복감이 더 크다는 것인데, 저는 전적으로 공감하며 지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