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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조 Jan 31. 2017

행복과 불행

왜 우리의 행복은 과거 속에만 존재할까?

행복한 사람들은 대부분 행복하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산다. 공기나 물처럼 늘 주어지는 것에 고마움을 느끼는 사람이 없는 것과 같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에 '범사에 감사하라'는 성경구절을 매일 기억해내고 감사하며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세월이 흐른 뒤, ‘아, 그게 행복이었구나!’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처럼, 행복을 자각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행복에 대한 자각이 이처럼 둔감한 것에 반해, 인간의 의식이라는 것은 불행에 대해서는 매우 민감하다. 따라서 인간은 행복보다는 불행을 인지하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긴, 대체로 불행한 존재로 남을 수밖에 없다.


고대 사람들은 고통을 최소화하고 쾌락을 극대화시킴으로써 행복을 추구했다. 이런 원시적인 행복추구는 노예제와 같은 다른 사람의 희생을 요구하는 형태로 발전했다. 소수 권력자의 쾌락이나 만족을 위해 다수가 희생된 사례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역사에서 수없이 볼 수 있다. 미국의 노예제도도 대표적인 사례다. 땅을 가진 지주들은 노동의 고통이나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기 싫었다. 프랑스 대혁명과 미국의 독립선언으로 평등한 인간의 권리가 문서로 확립되면서 다른 사람의 행복도 내 행복만큼 중요하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인문학의 발달로 인간성이 회복되면서 사람들은 쾌락이나 만족보다는 ‘의미’에서 행복을 인식하게 된다.


불행을 경험한 적이 없다고 해서 행복을 인식하거나 추구할 필요가 없다고 믿는 분들도 있지만, 불행은 누구에게나 예고 없이 갑자기 찾아온다. 일터에서 어떤 놈과 눈이 맞은 아내가 갑자기 이혼하자며 대든다든가, 실연의 아픔을 견디지 못한 딸이 어느 날 자살한다든가, 속이 쓰려 병원에 갔더니 위암 말기라며 3개월의 시한부 생명이라든가, 수학여행 간다고 신바람 나서 나갔던 아이가 배가 뒤집히는 바람에 물에 불어 터져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시신이 되어 돌아올 수도 있다. 뭐, 이런 일들이 드라마 혹은 뉴스에서나 나오는 일이고 나한테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주장하는 분들에게는 할 말이 없다. 하지만 그런 불행을 당한 분들도 그런 일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같은 생각을 했다는 것만은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불행이 예고 없이 갑자기 누구에게나 찾아온다는 점은 같지만, 그런 불행을 대하는 자세까지 누구나 같은 것은 아니다. 2013년 내가 알던 두 분이 운명했다. 47년생의 남자와 44년생의 여자분으로 두 분 모두 암이었다. 남자분은 지인들을 만날 때마다 자신에게 닥친 운명을 원망하며 슬퍼서 눈물을 흘렸고, 여자분은 모르는 사람은 환자인지 모를 정도로 의연해서 가까운 사람들만이 그분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작년에 돌아가신 어떤 분도 후자에 가까웠다. 40년이 넘는 미국이민 생활 끝에 가족들이 보는 가운데 운명한 그분이 달랐던 것은 자신이 말기 암이라는 사실을 모두에게 알렸으며, 병 뒤에 숨지도 않고 사람들을 만났으며 병 앞에서 당당함으로써 모두에게 귀감이 되었다. 비록 병마에는 쓰러졌을지언정 자신이 당한 불행에 패배하지는 않았다. 그런 바탕에는 용기가 있었다.


자식을 세월호 사고로 잃은 슬픔에 스러져서 삶에 대한 의욕조차 잃고 하루하루 버티는 부모도 있고, 왜 자식을 그렇게 잃어야 했는지 밝혀서 다시는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아야 한다는 신념으로 거리에 나선 부모도 있다. 누가 옳은지는 말할 수 없지만, 어느 쪽이 바람직한지는 알 것 같다. 평소에 인식하지 못하던 행복도, 불행을 만나야 비로소 깨닫게 되는 인간은 태생적으로 어리석은 존재다. 세월이 흐르면 모든 것이 변한다. 젊었을 때 총기가 있었다는 것도, 나이가 들어 기억력이 없어져서야 깨닫는다. 나이가 들수록 쾌락이나 만족보다는 의미에 더 행복의 기준을 두는 것도, 사랑하는 사람과 밤새워 사랑을 불태울 수 없을 지경에 이른 열패감의 결과일지도 모른다. 세월이 흘러 변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에 집착하는 것이야말로 시대착오적인 꼰대(?)다.


금년에 아들이 서른한 살이 된다. 1986년 녀석이 태어날 때는 셋째라고 의료보험이 적용되지 않았다. 아이를 많이 낳는 것은 매국 행위나 다름없었던 시절이었다. 30년이 지난 지금은 아이를 많이 낳으면 애국자가 된다. 셋째를 낳으며 축하금까지 주는 지방정부도 있다고 들었다. 매국을 애국으로 바꿔버린 것, 또한 세월이었다. 다른 예도 있다.


“여동생이 있는데 빚을 졌다고 해서 5천만 원을 준 적이 있습니다. 지금이라면 그렇게 못하지만 10년 전에는 여유가 있었거든요. 그런데 여름에 휴가 가고 아이들 학원 보내는데 쓰는 거예요. 그리고서 남는 돈으로 빚을 조금 갚더군요. 어이가 없었지요.” 얼마 전에 술친구를 만나 들었던 이야기다. 듣는 나도 어이가 없기는 마찬가지였으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게 아닐 수도 있었다. 세월이 변했는데 우리의 의식구조만 변하지 않은 것은 아닐까? 하는 역발상이었다.


우리 세대는 내일이 오늘보다 중요했다. 따라서 내일의 행복을 위해서 오늘의 행복을 저당 잡고 살았다. 그것을 ‘희망’이라는 미명으로 포장했으며 희망은 곧 행복이었다. 혹 그것은 착각이지 않았을까. 기득권과 위정자의 통치수단에 현혹된 것은 아니었을까. 과연 내일이란 것이 있는 것일까. 항상 오늘만 있었지 내일은 없었다. 내일은 또 다른 이름의 오늘이었으며 내일은 영원히 내일이었다. 지금 이 순간을 놓치고 나면 이 순간은 영원히 없다. 그렇다면 결코 오지 않을 내일보다 지금 이 순간이 중요한 것은 아닐까. 내일을 생각하지 않고 오늘 당장의 행복에 집중하는 그들, 내가 어리석다고 생각했던 그들이 오히려 현명하고, 나는 구닥다리 꼰대가 되어 현명한 척하는 진정 어리석은 자가 아닐까.


모자란 인간의 못난 상상이라고 꾸짖는 분들에게는 변명 구실이 있다. 천동설과 같이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믿음에 대해 의심을 갖고 질문을 던질 때, 인류는 크게 한걸음 전진해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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