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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조 Feb 02. 2017

겸손

반기문 씨에게 배우는 겸손

'겸손'의 사전적 의미는 '남을 존중하고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태도가 있음(네이버 어학사전)'이다. 유사 단어로는 '공손', '겸양', '겸사', 반대말로는 '교만', '거만', '오만'이 있다. 영어에도 여러 단어가 있겠지만, 가장 많이 쓰이는 단어는 'humble'이다. 아이들을 키울 때, 직원들과 대화할 때, 가장 많이 사용한 단어였다. 말로 하기는 쉽지만 현실에서는 지켜지기 힘든 게 바로 "Be humble"이다.


내가 경험했던 이민사회도 그랬다. 낯선 타국에서 성인으로 만난 사람들은 종종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한국에서 어떤 일을 하고 어떤 학교를 나왔는지, 얼마나 대단했는지 과시하곤 했다. 묻지도 않았는데 S대를 나왔다고 하든가,  OO회사에서 얼마나 대단한 일을 했다든가 하는 식이다. 이민생활이 얼마나 팍팍하고 살기 힘들다는 이야기는 좀처럼 듣기 힘들었다. 돌이켜보면 나도 그런 속물이었다. 알량한 직장에 다니고 있으면서도, 얼마나 잘 나가는 회사인지 강조했던 것은, 'S대를 나와 유학했으면 뭐 하냐, 기껏 세탁소 주인 아니냐?'하며 비하하고 싶은 마음이 깔려있었을 테니까.


그러고 보니 어린 시절의 못난 열등감도 내세우고 싶은데 내세울 게 없어서 생겼다는 점에서, 사전적 의미의 겸손과는 거리가 멀기에 나타난 심리상태이었던 것 같다. 그걸 60이 넘어서야 깨달았으니 멍청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수십 년이 지났으니 그때의 그 상처는 아물어 흔적도 없어졌겠지만, 이제라도 어린 시절의 상처 언저리를 찾아 어루만져주어야겠다.


남을 높이고 자신을 낮춘다는 겸손의 의미는 종교에 더 가깝다. 타인을 존중하고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마음을 지닌다는 게 그만큼 어려운 까닭이다. 깊은 수양과 높은 인격을 갖추어야 가능한 경지다. '세상에서 겸손해야 주 안에서 존귀한 자가 될 수 있다'라고 가르치는 교회나 성당에서도 겸손한 사람을 만나기는 로또 당첨만큼이나 힘들다. 모든 종교인들이 프란체스코 교황과 같은 겸손한 자세를 유지한다면 오늘날 종교가 지탄의 대상이 될 턱이 없다.


나이를 따지는 것도, 월급이나 수입을 묻는 것도, 몇 살 어리다고 반말을 하는 것도 ‘나’를 내세우고 싶은 작은 교만에서 비롯된다. 교만의 종착점에 '갑질'이 있다. 남을 존중하는 겸손과는 완전한 반대개념이다. 백화점 VIP 회원이랍시고 주차관리원을 무릎 꿇리고, 캐쉬어나 전화 응대원들에게 돈을 집어던지고 막말을 하는 행위는 저질 중에서도 최악이다. 교만이 병적 수준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교양 없고 돈 많은 장삼이사(張三李四)나 최순실만 이런 갑질을 저지르는 것도 아니다. 저명인사들 중에도 얼마든지 있다.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가 대표적이다. 미국사회에서 소수자이자 약자인 유색인종과 이민자들의 목을 죄고 있다. 그런 그도 기독교인임을 자처하며 기독교를 보호한다고 주장한다. 인류 역사에서 숱한 악행이 종교와 정의의 이름으로 저질러졌듯, 오만과 독선의 트럼프도 같은 전철을 답습하고 있다.


어제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대선 도전 포기를 선언했다. 예상은 했지만 그렇게 빨리 기권한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분의 지난 20일간의 행적도 겸손과는 거리가 멀었다. '세계 대통령(?)'을 마치고 인천공항에 도착하는 순간, 조그만 나라의 국민들은 '대통령이 돼 주십사'하고 면류관을 씌어줄 걸로 생각하는 듯 보였다. 입국장에서의 떠들썩한 광경, 시차 극복할 시간도 없이 다음날부터 곧바로 이어지는 화려한 행각이 그랬다. 이해하자고 들면 이해할 수는 있다. 지난해 말 최순실 사태가 벌어지기 전만 해도 대선 지지도는 1위를 차지했으니까. 미국에 있는데도 그랬으니 한국으로 돌아오면 당연히 그래야 된다고 믿었을 수도 있다.

지난 10월 중순까지 대선지지율 1위를 달리고 있던 반기문 씨

박근혜 대통령 탄핵이라는 변수도 있었지만, 그것보다 겸손하지 않았다는데서 나는 문제를 찾는다. 공항에서는 간단한 귀국인사로 끝내고 승용차를 타고 귀가했다면, 그리고 며칠 집에서 조용히 지내면서 여론과 정세를 파악한 뒤 움직였다면, 지지자들보다는 반대자부터 만나며 의견을 들었다면 달라지지 않았을까. 지지자들에게는 몰라도 그런 회동은 반대하거나 중도 인사들에게는 너무 교만해서 눈살이 찌푸려지는 것이었다.


그분이 겸손하지 않았다는 것은 어제 사퇴 기자회견에서, 자신이 아닌 남 탓으로 돌린 것에도 명백히 드러났다. ‘인격살인에 가까운 음해’라고 주장했으나, 겸손한 인격이었다면 그런 음해를 하도록 만든 자신을 먼저 탓해야 했다. 자신이 너무 순수했다는 말 대신 겸손하지 못했다고 해야 옳았다. 그분은 마지막까지 다른 사람을 존중하지 않았고 자신만 추켜세웠다. 그럴수록 타인의 눈에 비친 자신이 더 초라해지고 더 옹졸해 보인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사과는 겸손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미덕이라는 것을 이해했더라면, 마지막 모습을 그토록 추하게 남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 같은 범인이라면 몰라도 큰 인물이 될 사람은 겸손이 필수 덕목이다. 남을 존중하고 자신을 낮추는 대통령은 국민에게 거짓말하거나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리지 못한다. 경쟁자를 깎아내리기 급급하고 근거 없이 헐뜯지 않으며 상대편의 의견도 경청한다. 약자인 이민자들이나 소수자인 유색인종을 탄압하지 않는다. 겸손한 인물을 지도자로 가져야 하는 이유다. 그런 점에서 한국도 미국도 대통령을 잘못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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