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4 걸어서 5분 거리에 아지트가 생긴다는 것

집 앞에 동네책방이 있다는 행복, <주책방>

by 두망

20년간 살았던 고향을 떠나 직장을 잡고 상경하여 바쁘게 산지 어느덧 6개월. 여름휴가철을 맞아 1주일간의 긴 휴가를 받고 고향집으로 향했다. 코로나로 인해 어느 먼 곳으로 훌쩍 떠날 수 없는 요즘, 별다른 선택지가 없어서 고향에 내려왔다. 선택지가 없으니 고민 없이 선택할 수 있어서 좋다. 오랜만에 온 집에서 무거운 짐을 풀어놓고 침대에서 뒹굴거리는 것도 잠시뿐, 조금만 오래 누워 있어도 금방 허리가 아프고 좀이 쑤셔 좀처럼 가만히 있지 못하는 나는 집 주변에 있는 산책코스나 걸을까 싶어 밖으로 나왔다.


자주 걷는 익숙한 길보다는 새롭고 낯선 길을 좋아하는 나지만, 그 익숙한 길이 몇 개월 만에 걷는 길이면 이야기가 다르다. 익숙함보다는 그리움에 가까운 감정이라고나 할까? 알고 있던 풍경이 그대로 있으면 그것대로 반갑고, 낯선 풍경이 펼쳐지면 그것대로 신난다. 길을 걷기만 해도 그리움, 익숙함, 설렘 등 다양한 감정을 느끼게 되다니. 분명 남는 장사다.


집에서 나와 익숙한 길을 걷다 보면, 대로가 아닌 골목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곳이 어디인지 안다는 자신감이다. 내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으면 조금 길을 헤매더라도 불안하지가 않다. 종종 살아가다 보면 내가 바르게 가고 있는 게 맞는지 불안할 때가 있다. 지금 내가 어디쯤 서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매일매일 걸어도 불안한 길을 걷다가 이렇게 익숙한 장소에 오면 신이 날 수밖에 없다. 여기는 내가 수십, 수백 번 걸어왔던 길이니까. 여기가 어디인지 정확하게 알기에 조금 방향을 트는 것쯤은 하나도 두렵지 않다.


익숙한 길을 오랜만에 걷다 보면 나의 기억력이 얼마나 형편없는지를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저 카페는 새로 생겼나 보다' 생각하면 이미 몇 년 전부터 이곳에서 장사를 하고 있는 카페이거나, '여기 있었던 식당은 없어졌구나' 하고 아쉬워하면 바로 다음 골목에서 여전히 장사를 하고 있는 식당이 보인다거나 그런 식이다. 수백 번을 걸었던 길이지만 나의 비루한 기억력은 이 길을 새롭게 만들어 준다. 이처럼, 내 기억력은 결코 좋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지금 내 앞에 보이는 이 책방은 분명 처음 보는 공간이다. 그렇지 않다면 지난날 집 근처에 책방이 없음을 한탄하며 책을 보고 싶을 때마다 걸어서 30분이 걸리는 교보문고로 발걸음을 옮겼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집 앞에 동네책방이 있다는 행복, <주책방>


KakaoTalk_20210922_223815701.jpg 집 바로 앞에 책방이 생기다니, 이것은 정말 큰 행운이다. <주책방>


혹시 책방이 아닌데 내가 착각한 것은 아닌지 잠시 주춤했지만, 착각이라 하기에는 간판에 크게 적혀있는 <책방>이라는 단어는 너무나 명확하게 내 눈에 들어왔다. 이 정도면 혹여 착각일지라도 나에게는 죄가 없다. 저렇게 크게 책방이라는 간판을 달아 놓으면 나 같은 책 덕후는 당연히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문을 열 수밖에 없다.


분명 이곳은 지하주차장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들어간 주책방은 예전의 모습은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깔끔하게 인테리어가 되어 있었다. 더군다나 내부는 겉에서 보이는 것보다 훨씬 넓고 쾌적해서 이곳이 지하라는 것이 느껴지지가 않는다. 지하에 있는 공간은 입구를 제외하면 대부분 파묻혀 있기 때문에 실제 밖에서 보이는 것보다 넓기 마련이다. 그러나 넓다고 모두 좋은 것은 아니다. 지하 특성상 햇빛이 안 들어오기에 조명으로만 공간을 밝혀야 하는데, 자연광에 비할 수는 없다. 또한, 지하공간 특유의 습기와 서늘함은 아무리 설비의 힘을 빌린다고 하더라도 지상공간보다 쾌적할 수 없다.


그러나 이 공간이 책방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자연광이 없기에 은은하게 주위를 밝혀주는 조명은 책에 더 집중할 수 있게 해 주고, 약간의 습기와 서늘함은 책을 변형 없이 보관할 수 있게 해 주며 (책은 햇빛을 받으면 변질된다.) 창이 없어서 밖을 바라볼 수 없는 공간은 오랫동안 앉아서 책에 집중할 수 있게 해 준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넓은 공간은 당연히 책을 더 많이 보관하고 많은 사람을 머무르게 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굉장히 긍정적이다. 아니 이건 뭐 공간 차별(?)하는 거냐고 말해도 어쩔 수 없다. 차별하는 게 맞기 때문이다.


충분히 공간을 보고 감탄했으니, 이제 이 공간에 어떤 책들이 있는지 궁금해진다. 동네책방에 있는 책들은 보통 책방지기가 고르고 골라 데려온 책들이기 때문에 공간에 있는 책을 보면 책방지기가 어떤 취향을 가지고 있는지, 나와 취향이 잘 통할 것 같은지를 판단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책을 한 번 주욱 훑어보는데, 유독 내 눈을 사로잡는 책이 있다. 이런, 이렇게 한 번에 눈에 들어온 책이라면 오늘 데리고 가야 할 책은 이 녀석임에 틀림없다. 아직 책방에 있는 책을 모두 훑어보지 못했지만, 이렇게 명확하게 눈에 들어온 책이 있으면 구경을 멈추고 책을 들어 계산대로 발걸음을 옮긴다. 더 구경해봤자, 내 얇은 지갑을 확인하고는 마음 아플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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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지랄의 기쁨과 슬픔_신예희 (₩1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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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적으로는 분명 사람이 책을 선택하는 것이 맞다. 책은 책꽂이에 가만히 꽂혀있고, 사람이 그 책을 꺼내서 품에 안는 것이 당연한 물리법칙일 것이니. 하지만, 만약 책이 먼저 나를 유혹해서 뽑게 했다면 그건 책이 나를 선택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역시 이번에도 나는 책에게 간책당한 것이 맞다.


보통 책을 구입하기 전에 무엇을 확인할까? 모두 다 다르겠지만, 나는 우선 표지를 본다. 그리고 당연히 책의 크기와 색깔을 확인한다. 그다음에는 자연스럽게 제목을 읽어보고는 책을 아주 조심스럽게 펼쳐 아직 때 묻지 않은 내용을 슬쩍 훑어본다. 이 과정은 하나의 행동처럼 자연스레 흐르게 되는데, 이 모든 조건을 확인하고 마음에 들더라도 아직 나에게는 한 가지 과정이 더 남았다. 바로 뒷면의 가격을 확인하는 것! 결코 가볍게 여길 수 없는 부분이다. 하지만 이렇게 마지막 과정까지 왔다는 것은 이미 홀라당 넘어갔다는 것이기 때문에, 크게 가격에 휘둘리지는 않는 편이다. 그러나 만약 가격까지 합리적으로 저렴하다? 그렇다면 이건 분명 책이 나를 꼬신 거다. 그러므로 나는 죄가 없다. (아직 읽지 못한 책이 집에 쌓여있지만 말이다)


곧바로 계산대로 직행해 빠르게 책을 구입한 나는, 책방 안쪽에 위치하고 있는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집 앞이라 시간적 여유도 있고, 책방의 은은한 조명과 약간 서늘한 공기 그리고 사방 어느 곳을 둘러봐도 책으로 가득 찬 공간에서 조금 더 머물고 싶었기 때문이다. 오래 공간에 앉아있기 위해 부담 없이 마실 수 있는 차를 한 잔 주문하고는 곧바로 책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소비야말로 인간만이 할 수 있는 행위 중 하나이다. 돈이라는 것을 사회적 가치로 정해놓고 그에 합당한 물건이나 서비스로 교환하는 행위. 한 가지 행위로 희로애락의 다양한 감정을 느낄 수 있는 데에는 소비만 한 것이 없다. 누군가에게는 합리적인 소비가 누군가에게는 과소비가 될 수 있고, 누군가에게는 검소하다는 기준이 누군가에게는 사치스럽다는 말을 듣게 한다.


자본주의에서 살아가는데 소비는 반드시 필요하다. 때문에 소비는 많은 사람들의 구설수에 오르기 마련이지만 결국에는 자기중심적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다. 누군가에게는 가치가 없을지라도 나에게 가치 있는 물건 혹은 서비스라면 당연히 소비해야 한다. 누구도 이에 대해서 '너는 틀렸고, 내가 옳다.'고 자신만의 잣대를 들이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사실 이번 책을 구입하는 데에는 제목이 아주 큰 역할을 했다. 돈지랄이라는 강렬한 표현이라니. 상대방의 소비를 알고 싶다는 것은, 결국 상대방의 취향과 성격, 가치관 등 모든 것을 알고 싶다는 이야기와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나는 왜 이 책을 선택한 것인가. 글을 쓰는 작가가 소비를 돈지랄이라고 표현하고 자신의 소비에 대해서 글을 쓴다는 것은 적어도 나의 소비에 대해서 죄책감을 가지지 않게끔 만들어주지 않을까라는 기대감이었다. 제목부터 자신의 죄를 인정하겠다는 뉘앙스가 아닌, 내 이야기 좀 들어봐라고 하는 설득의 표현과 비슷하였으니.


물론, 나의 기대감은 적중했고 나는 더 이상 내 소비에 대해서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책방에서 구입한 책을 앉은자리에서 다 읽어버린 나는, 책방을 나설 때에는 집에 가서 읽을 새 책을 가지고 가는 것이 예의라며 아까 미처 끝내지 못했던 책방 구경을 끝내고 그 와중에 나를 유혹한 책 한 권을 더 구입하고야 말았다. 책에서 얻은 배움은 생각보다 쉬이 사라지기 때문에, 오늘의 깨달음을 잊어버리기 전에 서둘러 책을 안고 계산대로 가는 와중, 아직 읽히지 못한 채 집에 쌓여있는 책들이 떠올랐지만 애써 무시한 것은 나만 아는 비밀이다.


오늘의 나에겐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
어디에 투자해야 하는지,
무엇을 할 때 가장 가슴 떨리고 행복한지
주기적으로 업데이트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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