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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덤윤 Jan 12. 2021

사유서

정우 - 자장가


정우님의 자장가




  짙게 앉은 새벽이 벗어둔 안경에 비친다. 여전히 실패다. 밤은 여전히 밤. 내가 마침표를 찍지 않아도 하루는 비스듬히 끝나고, 어느덧 두 시 반. 오늘은 분명히 일찍 잠들려고 했는데. 점심에 마신 카페인 두 잔이 아직 혈관 어디쯤에 남아있었나 보다. 이 끔찍한 순환은 어디서 끊어야 할까. 잠을 못 자도 날 선 두 눈을 부릅뜨고 버텨내야만 하기에, 내일도 의무처럼 커피를 마셔야 한다. 그럼 내일도 반복되는 지루한 결말. 또 그다음 날을 버텨야 할 테고. 털어내지 못한 어제들 눈밑에 모인다.          


  불면증은 재미없는, 빤한 습관이라 생각했다. 카페인을 소화시키기 위한 생각들은 빨간 필라멘트 아래에 몽글몽글 피어난다. 잠드는 법을 잊어버린 것만 같았고, 그런 김에 차분히 생각해보니 잠드는 법은 배운 적이 없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다섯 시간을 꼬박 넘겨 자 본 날이 가물가물했다. 간혹 휴일이면 약을 빌려 햇살이 널브러진 아침을 맞았다. 휴일엔 운전대를 잡을 일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사춘기가 가져온 이 증세가 떠나질 않는 걸 보니, 어쩌면 아직도 사춘기 어딘가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분명 머리가 아프다고 말했는데, 투박한 손이 배를 문질렀다. 당신은 이러면 다 낫는다며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는 함께 자자며 당신의 둥근 베개를 내어줬다. 조금은 높은 베개를 베고 배를 간지럽히는 당신의 두꺼운 옥반지의 감촉을 느꼈다. 그러면 능숙하게, 낮은 목소리로 흥얼거렸다. 글을 읽지 못하는 당신의 콧소리 자장가. 드문드문 기억나는 가사를 읊는 것 같았지만, 초등학생이던 나는 그 흥얼거림을 끝까지 들은 적이 없었다. 입을 꾹 다물고 입술 사이로 흘리던 콧노래에 홀린 듯 잠들었다. 당신이 덮어준 얇은 꽃무늬 이불을 걷어내며 눈을 뜨면, 감쪽같이 말짱해졌었다.           


  단 한 번도 나는 당신보다 먼저 깨어본 적이 없었다. 분명 창밖이 어두운데도 해가 중천이라 했다. 맞벌이하던 부모님이 먼저 나선 아침. 분주하게 등교를 준비하던 나보다 당신이 늘 더 급했다. 눈에서 졸음도 내쫓지 못한 채로 준비를 마치면 당신은 내 가방을 짊어지고 먼저 문을 나섰다. 초등학생 걸음으로 이십 분이 넘는 거리는 참 고역이었다. 그런데 물리적인 거리보다 나를 괴롭히던 문제가 하나 있었다. 당신의 걷는 속도였다. 키도 크지 않으면서, 어찌나 빠른지 나는 이십 분 동안 거의 달려야만 했다. 한쪽 어깨로 짊어진 가방에는 책도 몇 권이나 들어있었는데, 당신은 뒤도 돌아보지 않으며 씩씩하게 걸어갔다. 동네의 할머니들 마주칠 때만 걸음이 늦어졌는데, 그럼 나는 신발주머니를 앞뒤로 흔들며 내달려 따라잡았다. 우리는 이토록 긴 등굣길을 꼬박 사 년을 함께 했다.           


  새벽에 홀로 화장실을 가려다 넘어져서 골반이 깨졌다 했다. 마취를 이겨낼 기력이 없어서 수술도 포기한 채, 당신을 모시던 외삼촌 댁으로 그냥 돌아왔다더라. 그러면서 또 뭐가 그리 즐거운지 나를 보며 웃는다. 앞으로는 부축 없이 걸을 수 없다고 했다. 평소에 당신과 아옹다옹하던 엄마가 뒤에서 눈물을 흘렸다. 늘상 투닥거렸으면서, 참 서럽게도 울더라. 기력이 쇠한 당신의 눈동자를 마주쳐도, 이상하게 슬프지가 않았다. 나의 감정선을 의심하면서, 당신을 따라 웃어 보았다.          


  고단하고 가쁜 숨. 바닥에 깔린 이불이 얇아 등이 배겼다. 잠자리가 바뀌었지만, 여전히 익숙한 시간. 쌔액- 소리를 내며, 시들어가는 당신의 날숨을 봤다. 오래전 내 등짝을 내리치던 매운 손바닥이 가지런히 모아 이불 위에 놓여있다. 내가 하지 말라고 몸부림치면 당신은 즐거워했었다. 평생을 끼고 다닌 옥반지가 내 머리에 닿을 때마다 참 아팠었는데. 할미 방에서 할미랑 같이 자, 이십여 년 동안 변치 않은 말버릇. 이제는 내 이름을 기억해내는 데도 몇 개의 이름을 거쳤으면서, 어린 날 코감기를 달고 살던 하나뿐인 외손주의 모습은 잊히지 않는가 보다. 당신이 좋아하는 분홍 꽃들이 그려진 얇은 이불을 모아 가느다란 팔 위에 덮었다. 그날은 아직 소매의 길이를 고민하는 여름의 끝자락이었지만, 나를 위해 꼭 켜야 한다는 전기장판에 몸 달아 한동안 뒤척거렸다.          

 

  이제 나는 익숙한 콧노래가 아닌 자장가를 빌려 잠을 청한다. 입이 걸걸하고 드셌던 당신의 고집을 닮아서일까. 눈물이 나진 않는다. 속절없이 시간이 간다. 계절은 조금씩 당신을 데려가고 있다. 이제는 달리지 않아도 걸음을 맞출 수 있는데, 당신은 제자리에 멈춰서 하루하루에 기억을 내려놓는다. 예전처럼 당신의 발걸음을 밟으며 두고 간 날들을 모아 베개 밑에 넣어둬야겠다. 그럼 언젠가 당신을 꿈꿀 수 있을 테니까.           


  밤마다 돌아눕는 법을 잊어서, 등은 뜨겁고 배가 차다. 애정하는 노래 가사처럼 혼자서 잘 해낼 수 있을 거야. 내가 오늘을 미처 재우지 못해도 내일은 뻔뻔하게 고개를 들이미니까. 오늘은 수백 번 들었던 자장가 대신, 입을 다물고 가사 없는 노래를 흥얼거린다. 일찍 잠드는 법을 공부해야겠다. 훗날 책가방을 한쪽 어깨로 짊어진 당신의 등을 쫓아 달리는 꿈을 꾸게 된다면, 오래오래 달릴 수 있도록.      


아, 오늘도 벌써 네 시다.

지각의 사유로 나의 할머니, 당신 이름 석 자를 적어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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