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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닥불이 타는 소리가 들린다. 이곳은 내가 너와 함께 들어왔던 그 방과 똑같다. 꿈속의 호텔이라서 그런 건가 디자인도 완전히 같다. 하얀 대리석 현관과 사람이 있으면 저절로 불이 켜지는 커피테이블이 거실 중앙에 놓여있다.
발소리를 죽이고 조심스럽게 방을 둘러본다. 다른 세계의 너와 나는 평화롭게 잠들어 있다. 왠지 타인의 사생활을 훔쳐본 것 같은 기분에 멋쩍다. 깨워서 대화를 시도해볼까 싶다가도 평화로운 이 정적을 깨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에 문을 열고 또 다른 704호를 나왔다. 여전히 황금색 복도가 끝없이 펼쳐져 있고, 막막하지만 다시 길을 나서본다. 모든 문에는 호텔에서 본 것과 같은 황금색 문패가 걸려있다. 704호, 704호, 704호…
또 다른 문을 한 번 더 열어본다. 현관에서 고개만 쭉 빼서 거실을 바라본다. 나는 침대 가장자리에 누워 잠을 자고 있고 화장실에서는 물줄기가 뻗어 나오는 소리가 들린다. 또다시 문을 닫고 옆 방 문을 열어본다. 현관에서 상체만 살짝 굽혀 거실을 몰래 보려고 하는데, 욕실에서 네가 나왔다. 너는 침대 가장자리에 누워있는 내게 손을 내민다. 이젠 규칙을 알겠다. 그 옆방에서는 아마 내가 너의 부드러운 소매 끝을 만지고 있을 것이고, 그 옆옆 방에서는 내가 일어나 샤워를 하고 있을 것이고, 너는 머리카락을 말리고 있을 것이다. 더 이상 문을 열어보지 않기로 한다. 영화 필름을 펴보면 사람의 모든 행동이 시간 초 단위로 장면으로 남겨져 있듯이 꿈에서도 나와 너의 행동이 필름처럼 남아 재생되고 있는 것이었다. 어딜 가도 모든 704호의 객실에서는 내가 이 방을 나서기 전까지 너와의 장면이 재생되고 있는 것이다.
이곳은 나의 꿈 속이지만 이토록 지루할 데가 있나. 하지만 매우 평화롭다. 어쩌면 내가 굳이 몰래 704호 객실 안을 훔쳐본 것도 그 세계의 평화를 깨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 꿈속의 너와 나에게 직접 다가간다면 영화 인셉션처럼 나를 꿈속의 불순물로 여기고 제거하려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혹여나 하는 마음도 있었다. 아무튼 끝이 없는 미궁 속 객실 탐사는 이젠 그만하고 싶어졌다. 놀랍게도 내가 그 생각을 함과 동시에 일직선, 하나의 선으로 무한히 존재했던 복도의 형태가 x자로 변화했다. 즉 두 직선이 교차한 형태의 복도가 만들어졌고, 나는 그 교차점에 서 있었다. 이게 내 꿈 속이라서 내 상상만으로, 혹은 나의 바람만으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건지 이 변화와의 연계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었다. 다만 추측할 뿐이었다, 그게 아니고선 이런 변화가 갑자기 일어날 리가 없었기 때문에.
원래 쭉 뻗어있던 복도 말고 수직방향으로 새로 생겨난 복도에 펼쳐진 또 다른 704호를 방문했다.
그 세계는 완전 엉망이었다. 내가 너에게 죽임을 당하고 있었다. 너는 흰 베개로 내 얼굴을 꽉 누르고 있었다. 죽이고 있는 사람이 현관에서 그대로 나타나서 놀란 나머지 베개에 힘을 풀어졌다. 위협을 당한 그 세계의 나는 이 틈을 노려 너에게 헤드락을 걸었고, 너는 빨개진 얼굴로 캑캑거리며 검지손가락을 들어 이 절망적인 세계에 들어온 나를 가리켰다. 격투를 벌이던 ‘나’는 그것 역시 보지 못하고 너를 제압하는데 온 힘을 다하고 있었다. 꿈에서 살인이 일어나지 않길 바라며 옷이 이리저리 널려있는 카펫을 밟고, ’나‘의 등을 툭툭 쳤다. 뒤를 돌아본 ’나‘는, 깜짝 놀라서 그 역시 제압하던 그녀를 풀어줬다.
그녀는 컥컥 소리를 내며, 숨을 몰아쉰다.
- 너희 둘이, 한 패지? 쌍둥이지?
- 그럴 리가. 설마.?
- 똑같이 생겼지만 쌍둥이는 아니야. 나를 죽이지는 말아 줄래? 물론 진짜 ‘나’는 아니지만, 그래도 기분이 이상해서.
다시 정신이 든 ‘너’와 ‘나’는 새로운 ‘나’의 등장에 적잖이 당황스러워한다. 너는 나를 노려보며 경계하는 눈빛을 보냈지만, 그래봤자 이 세계의 너도 나의 꿈의 일부이기 때문에 우호적이진 않아도 위협적이진 않다.
- 이제 나는 나가 볼 테니, 둘이 알아서 해결하도록 해.
그렇다. 나도 내 앞에서 살인이 일어나는 게 싫었을 뿐이다. 참 다행인 일인지 불행인 일인지 얼굴이 똑같은 ‘너‘를 봐도 내 꿈속에서 존재했던 진짜 너와 다르다는 걸 느낀다. 다시 돌아가서 너를 안고 잠들고 싶다. 어지럽게 얽혀있는 난투장을 나와 문을 닫았다. 뒤에서는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났고, 이어 큰 물체가 쓰러지는 소리가 났다. 왠지, 이 방은 그냥 놔두면 안 될 것 같아 열쇠를 문고리에 넣고 다시 잠갔다.
복도를 다시 걷기 시작한다. 내가 이 꿈의 규칙 내지는 비밀을 밝히고 싶다는 생각에서 출발했지만, 어느새 다시 나의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기 시작했다. 어떻게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실을 손잡이에 걸고 움직였다면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이 든다.
또 다른 문을 열어보기로 한다. 가장 마음에 드는 꿈 따위를 고를 수도 없는 것이었다. 어쩌면 이 꿈은 악몽일지도 모른다. 영원히 갇혀버리는 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