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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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꿈이다. 너는 내 품 안에서 잠들어있다. 불이 꺼져있고 난로에서 장작 타는 소리가 들린다. 덮고 있는 이불은 너무나 가볍고 포근해서 따뜻한 수증기를 응축시킨 구름을 덮고 있는 것 같다. 왜, 너는 내 품 안에 안겨있는 건가 생각한다. 꿈에서는 좋고 나쁜 게 없나. 강렬함만이 꿈의 소재가 되는 기준인 건지 오늘 낮에 너에 대한 강렬한 인상이 꿈에서까지 이어질 줄은 몰랐다. 연인으로는 더더욱 예상하지도 못했다. 그런데 나는 네가 내 품에 안겨있는 게 꽤 말이 된다고 느낀다. 심지어 나는 널 사랑하는 것 같다. 잠들어 있는 너의 모습을 보는데 평화롭고 이대로 평생이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니 이건 사랑인 것 같다. 나는 너의 숨소리에 집중한다. 나의 팔에 닿는 너의 숨이 따뜻하다. 이대로 여기에 머무르고 싶다.
이대로 평생 머무르고 싶다는 생각은 위험한가. 너의 숨의 리듬에 맞추어 함께 잠 들려다가 문득 집으로 가길 소망하며 바다 위를 표류하는, 포세이돈의 저주를 피해 칼립소의 섬에 도착한 오디세우스가 떠올랐다. 분명 이곳은 낯선 호텔이지만 포근한 내 집 같고, 옆에 사랑하는 사람이 평온하게 잠들어 있는 상황이다. 이상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오히려 안정감을 즐길 수도 있을 것이다. 너의 옆구리를 간지럽혀서 너의 웃음소리를 들을 수도 있을 것이고, 전기 포트를 이용해 따뜻한 차를 끓여서 마실 수도 있을 것이다. 커튼 사이로 보이는 달을 보며 난로 앞에서 너를 껴안고 한참을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게 거짓말 같다. 이 호텔은 퇴실시간을 알려주지도 않았고, 너는 한시라도 나와 떨어질 수 없다는 듯이 행동한다. 나는 칼립소의 마법에 홀린 오디세우스인가, 그것도 아니면 오디세우스를 붙잡아 두려는 칼립소인가...
귀향하기 위해 온갖 모험을 자행하는 오디세우스를 떠올리며 일단 최대한 환상을 깨지 않고 이곳에 대한 단서를 찾기 위해 움직이기로 한다. 트루먼 쇼에서 트루먼이 제멋대로 움직였을 때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했더라. 나도 예상치 못하게 움직여보기로 한다.
몸을 옆으로 뉘어 침대 밖으로 나갈 준비를 한다. 꿈의 새로운 문을 열어보기로 결심한 걸 눈치라도 챈 듯이 너는 눈을 뜨고 상체를 기울여 나의 등에 매달린다. 너의 팔이 나의 목을 감싼다. 나는 너의 두 팔을 잡고 떼어낸다. 근데 팔이 이상하다. 부드러운데, 너무 부드러운데 동시에 너무 유연하다. 마치 우주에 간 연체동물처럼, 중력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것처럼 공중에 흐늘거린다.
뒤를 돌아보니 손에 잡힌 너의 팔은 온데간데없고 너는 비스듬하게 누워서 나를 쳐다보고 있다. 다시 이불 안에 누워 포근해지고 싶은 욕망도 있지만 꿈의 전부인 것 같은 이 방을 나가보고 싶다. 호기심이 더 컸다. 꿈을 상영하기 위한 세트장을 짓는 속도가 얼마나 빠른 건지 궁금했다. 이 정도 디테일이라면 오늘 나의 꿈은 이 방 안에서 사랑하는 '너'와 안정감을 느끼며 끝나는 것으로 예정되어 있었을 것이다.
너의 볼에 입을 맞추고 이불 밖으로 나왔다. 방안에 깔려있는 아이보리색 카펫은 여전히 잔디처럼 푹신하다. 잠옷 위에 검은 코트를 덧입었다. 다시 돌아올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 꿈에 다시 돌아올 기회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커피테이블 위에 놓인 704호 열쇠를 코트 주머니에 넣는다. 동해 바다처럼 깊은 푸른색의 문 앞에 서서 심호흡을 하고 황금색 손잡이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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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신병은 별게 아니야. 현실에 발 못 붙이고 사는 게 정신병이지.
- 네 누나를 봐라, 몇 년째 시험 합격도 못할 거 계속 붙잡고 있잖아.
- 거, 시험준비는 이제 그만하고 차라리 나가서 돈을 벌거나, 짧게 여행이라도 다녀오거나 하지 원.
누나는 명문대에 가려고 매일 공부를 한다. 근데 울면서 공부한다. 이제는 본인이 합격할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는 것 같다. 누군가는 가능성에 중독되어 있는 거라고, 그러니까 가족 중 누구라도 말려서 공부 그만하게 해야 한다고 했다. 나 역시도 누나의 네 번째 수능이 끝나고 방문을 단단히 틀어 잠근 채 조용히 있는 누나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 누나, 나는 누나가 공부하는 게 싫어. 시험공부해서 대학 들어가는 게 누나가 바라는 전부는 아니잖아. 지금은 전부 같을 수밖에 없지만 세상에 다른 일들을 하면서 살다 보면 마음에 드는 것들이 눈에 띌 거야.
방문이 세게 열리더니 나는 문짝에 머리를 박고 뒤로 넘어졌다. 이마가 얼얼했지만 그보다 놀라움 더 컸다. 누나는 울고 있었다. 오랜 기간 수능을 준비하면서 몸에는 근육이 빠져서 물렁한 살만이 남아있고 그 살덩이마저 얼마 없었다. 나는 누나의 얼굴을 제대로 본 지 1년도 더 됐다.
- 할 말 더 없니?
눈빛은 흐리고 기운조차 없는지 목에서는 쇳소리가 났다. 신경질난 목소리였다.
- 요즘 사람들 다 개나 소나 대학 가잖아, 근데 원하는 대학도 선택하지 못하는 스스로가 용납이 안 된다고.
- 누나 눈이 너무 높은 거일 수도 있잖아.
- 그러니까 그걸 못 참겠다고. 나도 최고의 대학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으면서, 좋은 사람들과 좋은 환경에서, 열심히 살아보고 싶다고. 근데 그게 매년 좌절되는 기분을 알아? 완벽한 처음을 바라는 것도 아니야, 그냥 내가 만족할 수 있는 결과만 내보고 싶다고. 근데. 근데., 이렇게 매번 안 되는 걸 나도 어떡해.
- 욕심나는 거 나도 알아, 누나가 어릴 때부터 공부 잘한다는 칭찬을 많이 들어왔고, 실제로 누나가 잘하는 것도 알아. 근데 매번 시험에서는 실력발휘가 안 되는 걸 어떡해. 그리고 누나, 점점 성적도 내려가고 있잖아. 열심히 하는데도.
- 슬럼프라고. 그리고 나는 내 문제를 너랑 지금 얘기하고 싶지도 않거든?
목소리는 공간을 찢을 듯이 날카로워지더니 끝으로는 자신의 방 문을 쾅 닫고 들어갔다. 부모님은 예민해진 누나의 상태에 대해서 정신과 상담을 받으러 가야 할지 걱정을 한지 오래다. 정말 될지, 안 될지 모른다. 누나가 우리나라 최고의 명문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맞을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른다.
부모님은 어릴 적부터 사고 한번 친 적 없고, 모범생에 완벽주의자인 누나와 어떻게 대화해야 할지조차 모른다. 그래서 몇 년이 지나도록, 그저 놔두었다. 몇 해 전 누나가 재수를 할 때, 한 번은 누나의 사주를 몰래 봤다. 방임을 해두면 언젠가는 이룰 아이라고, 대기만성할 것이라는 역술인의 말에 안도의 숨을 내쉬고, 시간의 흐름에 누나를 맡겼다. 하지만 누나 혼자만 시간과 공간의 방에 갇혀있다. 도저히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누나를 이대로 가만 두다가는 스스로를 죽일 것만 같다.
부모님은 누나의 손을 붙잡고 이야기했다.
- 얘야, 나는 네가 똑똑하다는 걸 알아. 그러니까 굳이 시험으로 증명하지 않아도 된단다. 네가 할 수 있는 건 세상에 많아.
- 엄마, 아빠. 우리나라에서 학벌이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서 그래? 환경이 얼마나 중요한데. 서울에서 태어난 애들도 다 달라. 대치동에서 태어나서 부모 가업 이으려고 쎄빠지게 공부하는 애들, 어차피 부모님 사업 물려받을 거니까 공부 열심히 안 하고 사람 다루는 거만 배우는 애들, 다 다르다고.
지방에 있는 애들은 얼마나 더 아무것도 아닌지 알려줄까? 지방에서 살면 재해가 일어나도 짧게, 그것도 아니면 아예 방송도 안돼. 나 엄마아빠 이렇게 성실하고 열심히 살았는데 남들보다 못하게 사는 거, 정말 속상해.
만족한다, 스스로가 만족하면 될 문제다 이야기하지만 엄마아빠 차를 바꾸고, 남들 다 가본 해외여행 엄마아빠는 인생의 목표잖아. 나는 그게 너무 배 아프다고. 왜 남들은 다 가지고 있는데 우린 못 가지고 이렇게 부러움에 미쳐서 살아야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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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열고 나오니 긴 복도가 펼쳐져 있었다. 분명 들어온 곳으로 나온 것이 맞는데, 묘한 기시감이 드는 복도다. 들어올 때 봤던 푹신한 오트밀 색 카펫과 은은한 미색 벽등이 끝없이 이어져있다. 직육면체가 끝없이 확장되어 있는 무한한 길이의 복도 같다. 끝이 보여야 하는데 끝이 까마득해서 미색 벽등이 복도를 밝히고 있는데도 복도의 끝은 암흑이다.
한번 이 길을 걸어본다. 길은 하난데 방향성이 두 개다. 나는 오른쪽 방에서 나왔기 때문에, 아니, 왼쪽,... 아니다. 다시 생각해 보니 방향성은 없다. 어디가 앞이고 어디가 뒤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오른손잡이이기 때문에 문을 나와서 오른쪽으로 돌았을 것이고, 지금 서 있는 방향을 기준으로 나는 오른쪽 방에서 나왔다. 복도를 따라 규칙적인 간격으로 황금색 문이 반복되고 있다. 정확히 내가 열고 나온 문과 같은 디자인이라서 다시 내가 나온 방을 찾아 들어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미노스의 궁전의 지하에 괴물을 가둬둔 미로가 있었다. 아리아드네는 테세우스에게 붉은 실을 입구에 매어 두고 출발할 것을 당부했고, 테세우스는 괴물을 죽이고 다시 붉은 실을 따라 미로를 탈출했다. 그리고 영웅이 되었다.
아리아드네가 있었다면 이 직선의 긴 미로에 대해 어떤 조언을 해줬을까. 사실 꿈에서는 눈을 감고 걸어도 맞는 길을 고를 필요가 없다. 정말 좋은 미로는 무한한 직선이다. 모든 가능성을 실험해 보기도 전에 생명의 존재의 숨이 끊어지는 그 무한함 자체가 긴 미로다. 크노소스의 미궁 라비린토스를 만든 다이달로스에게 나는 조언했으리라, '무한하고 긴, 직선의 길을 만들도록 하세요. 그 자체가 미로일 겁니다.' 누나는 대학 입시 전까지 학구열이 높은 명문중학교, 명문 인문계고등학교라는 탄탄대로, 어떻게 보면 긴 미로를 걸었고, 그 무한함에 아득함을 느꼈고, 결국 누나는 직선의 긴 미로 걷기를 포기했다.
나는 누나와 다르다. 누나는 상상력이 풍부한 편이 아니었다. 누나는 자신이 걷는 직선의 길 끝에 답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주변을 잘 살피지 못했다. 여기는 꿈이다. 원하면 열 수 있는 문이 무한하게 늘어난다. 복도에 있는 다 똑같아 보이는 황금색 문 하나를 열어보기로 한다.
문에는 황금색 황소가 그려져 있고, 덩굴이 문을 타고 올라가는 듯한 무늬가 새겨져 있다. 덩굴은 황소의 발목을 잡을락 말락 하게 자라 있다. 손잡이도 황금이다.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구분하는 건 꿈에서는 무용하다. 열쇠 구멍에 704호 열쇠를 넣고 손잡이를 아래로 누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