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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W >
너는 언젠가부터인가 꿈이 사라졌다. 너무 실망을 많이 했다. 사람이 노력에 의해 열 수 있는 선물상자 개수가 정해지고, 운에 의해 열어본 선물상자가 꽝인지 당첨인지 갈린다고 상상해 볼 때, 너는 100개의 선물상자가 주어졌는데 이제까지 99개의 꽝만 받은 셈이다. 아무도 너의 실력을 알아주지 않는다. 관심도 없다. 가장 가까운 친구는 네가 스스로를 희망고문하는 것이라고, 너는 영 운이 따르지 않으니 다른 길을 찾으라고 이야기한다.
아무리 실력이 있고 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도 만들어내는 게 온통 팔리지 않는 상품이라면 쓸모없다. 누군가가 알아보기를 무한정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모르모트도 보상이 주어져야 행동을 반복하는 게 아닌가.
어쩌면 너의 재능을 죽인 건 사회일지도 모른다. 모두가 유명세에 줄을 선다. 다양성은 줄어들고 하나같이 팔리는 것만 팔게 된다. 사람들은 열심히 하는 너를 연민한다. 열심히 하는데 결과를 얻으면 박수받지만 열심히 하는데 결과가 미미하면 불쌍하게 본다. 무명이 한 달이면 그래도 열심히 해보라고 응원받고, 무명이 삼 년이면 더 이상 무어라 언급되기도 망설여진다. 십 년이 되면 이제 충분히 해보았으니 다른 걸 해보라는 조언이 온다. 주변에 딱 십 년만 해보고 안되면 포기하고 다른 일을 찾을 테니 차라리 관심을 주지 말라 이야기했지만, 한껏 낮아진 자존감 때문에 세상이 삐뚤어져 보인다. 아니, 어쩌면 너는 재능이 없는 걸지도 모른다. 모두가 너를 알아보지 못하는데 과연 네가 재능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너의 현실에서 너는 맨 몸이다. 보호 장구도 없이 세상에 내던져지고 아무리 막아보려 해도 몸에는 상처만 늘어갈 뿐이다.
꿈이 연결되는 건 아주 쉽지만 아주 어려운 일이다. 같은 꿈을 꾸거나, 상대의 꿈을 믿으면 너와 나의 꿈은 우리의 꿈이 되는 것이다. 나는 너와 눈을 맞추고 너와 대화하고 호텔에서 잠에 들었다. 그리고 꿈을 꾸었다.
#. MK >
우리의 꿈에서는 더 이상 너와 내가 아니다. 너는 내가 되고 나는 너였다.
너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나의 등에 기댄다. 나는 꿈에서 꿈을 꿀 수 있는지 물었다. 아니, 꿈에서 꿈을 꾸면 깨어날 뿐이라고 너는 대답한다. 머리카락이 목을 간지럽힌다. 불안한 너와 우울한 나는 같은 자리에 누워 천장을 본다. 잠을 청해도 잠은 오지 않는다. 나는 부드러운 잠옷을 매만진다. 꿈이 이어진 이유는 모른다. 꿈에서 깨어나면 너와 나는 다른 사람이고 너와 나는 만날 일조차 없다는 것을 안다.
그날 우린 호텔에서 만났고 너는 나를 인터뷰했다. 어쩌면 현실은 무의식의 것들이 펼쳐진 환상일지도 모른다. 무의식으로 만들어진 여러 실체들 속에서 내가 원하는 '진짜'를 찾아내어 붙잡는 게 매일의 존재 이유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매일은 나를 나의 이상향으로 이동시키고 시간은 흘러간다. 어느새 머리가 하얗게 세어버린 나는 나에게 주어진 모든 매일을 썼기 때문에 영원히 꿈을 꾸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날 호텔에서 내가 너를 만나게 된 것도 내가 너를 바랐기 때문에, 너를 꿈꿨기 때문에 네가 나타난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네가 나의 무의식이 만들어낸 환상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는 너를 배웅했다. 발목에 걸친 샌들 스트랩이 헐거운지 너는 종종걸음으로 엘리베이터를 탔다. 눈인사를 건네고 버스정류장까지 걸어갔다. 1001번 버스를 타고 10평의 작은 월세방으로 향했다. 갑갑했던 구두를 벗고 축축해진 흰 양말을 벗어 세탁기에 넣었다. 화장실에 들어가 레몬 향 세정제로 손과 발을 씻는다. 가장 뜨거운 물로 손잡이를 돌렸지만 호스 안에 남아있던 얼음장 같은 물이 쏟아져 나온다. 비눗물이 다 헹궈졌지만 따뜻한 물이 나올 때까지 기다린다. 따뜻한 물로 얼었던 손과 발을 녹이고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낸다. 낮이지만 방 안은 어둡다. 옆 건물에 가까이 붙어있어서 빛이 잘 들지 않는다는 걸 알았지만 급하게 구한 집들 중엔 가장 괜찮은 집이라 1년을 계약했다.
나는 예술을 하고 싶었다. 예술을 해서 많은 돈을 바란 건 아니었지만 점차 생활은 궁핍해지고 있었다. 내 일만 하면서 살고 싶지만 세상은 내 일에 관심이 없었다. 나에겐 팬이 없었다. 존재만으로 사랑받는 건 대부분 유아기 때 끝이 난다. 더 운이 좋으면 청소년기까지, 더 운이 좋으면 청년기까지. 매우 운 좋은 손꼽히는 몇 명만이 죽을 때까지 존재만으로도 사랑받는다. 처음에 예술을 시작했을 땐 모두가 내 작품을 사랑해줬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고, 3년 차에는 스스로에게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고, 5년쯤 지나자 사랑받기 위해 나를 바꿨다. 9년쯤 되니까 나는 사라지고 왜 만들었는지 모를 작품만이 내 손에 들려있었다. 마치 이제 막 아이를 낳은 여자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자신의 품 안에 있는 갓난아이를 보고 '검붉은 덩어리가 내 아기가 맞나요?'라고 되묻는 것처럼.
더 이상 나는 내 것을 사랑할 수 없게 되었다. 이게 내가 바라던 미래였는지 되묻는다. 예술을 하고 싶었다는 문장에는 사랑받고 싶다는 진심이 숨어있었다.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고 싶었지만 사랑받기 위해 끊임없이 스스로를 증명하고 때론 포장해 봐도 나에게 유명세란 행운은 오지 않았다. 좋아하는 일을 해서 사랑받는 건 내 인생에서는 불가능하다고 결론지었다. 더 이상 꿈을 타인의 영역 안에 두지 않기로 한다. 사회에 쓸모없는 존재라는 우울함을 지우기 위해 사회에서 필요한 일을 하기로 결심했다. 작은 매거진에 취재 겸 편집자로 취직했다.
이젠 나에게 꿈이 없다. 존재만으로 사랑받는 꿈은 오지 않을 꿈이었다. 아무리 다가서고 기다려보아도 오지 않는 것들이 있다. 사라진 나의 조각들을 찾아내는 게 더 중요해졌다. 나는 나를 깎아내고 또 깎아내면서 나라고 부를만한 것들이 없어졌다. 거울 속 나를 바라보면 두 눈엔 아무것도 없었다. 텅 비어있었다. 영혼이 조각나고 유실되었다. 이따금씩 잠에 들 때면 여전히 비어있는 나의 일부가 그리워서 눈물이 흘렀다. 왜, 사랑받으려고 나를 없애버렸는가. 그럴 때면 작은 방 안에서, 싱글 침대에 누워 고전소설을 읽었다. 다른 세계는 잃어버린 영혼의 일부를 잠시나마 빛으로 채워주었다. 하지만 그 빛은 영구적인 게 아니었다. 나는 다시 나의 일부를 찾아내야 했다. 다시는 시리지 않도록 내 일부를 채워 넣어야 했다.
비록 잡지사 에디터로 취직했지만, 좋아하는 일로 성공한 이를 인터뷰하는 일은 불편하다. 나의 하찮은 자존심이 짓눌리는 것 같다. 그럼에도 나는 인터뷰를 해야만 한다. 나는 안되고 너는 되는 일이 있다는 걸 마주하도록 스스로 걸음 하는 게 스스로의 존엄을 지키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를 보면서 울렁거림을 느꼈다. 부드러운 자주색 벨벳 소파에 몸을 늘어뜨린 채 느슨하게 눈을 감고 있는 너는 창밖에 내리는 포근한 흰 눈을 배경으로 한 명화 속 주인공 같았다.
맞은편 소파에 앉아 네가 눈을 뜨길 기다렸다. 모든 봉제선이 완벽히 마감된 옷을 입고 있었고, 누가 봐도 경제적인 안정을 이룬 삶을 사람으로 보이는 차림새였다. 너는 얼마 지나지 않아 천천히 눈을 떴다. 조금 놀란 듯이 눈썹을 들었다 올리는데 그 모습에 속에서 신물이 올라왔다. 너는 세련된 말투로 미리 준비한 커피를 권했다. 커피는 적당히 식어있었고 가볍게 입에만 대고 내려놨다. 간단하게 자기소개를 하고 준비한 인터뷰지와 노트북을 꺼냈다. 실내공기처럼 건조한 질문에 건조한 대답이 오갔다. 지금까지 너의 성취와 너의 팬들에 대한 질문, 그리고 앞으로의 행보가 인터뷰 내용의 주였고, 이미 많이 받아본 질문인지 답변은 꾸밈없고 신속했다.
스물다섯 개의 준비한 질문이 모두 끝이 났고 너는 더 할 말이 없냐는 듯이 나를 쳐다봤다. 눈동자가 까맣다. 흔들림 없는 눈동자가 불쾌하다. 현실과 이상이 일치되지 않아서 괴로운 내 삶과 전혀 다른 너의 안정감 있는 삶이, 화려해 보이는 너의 인생이 부럽다. 갖고 싶다. 저렇게 살면 행복할까? 행복해야 할 것 같은데. 소매의 단추를 매만지며 정말 묻고 싶었던 질문을 한다. 개인적인 질문인데,- 뜸을 들이고.
- 그래서, 행복한가요.
라고 묻는다. 행복하다고 해도 재수 없고 행복하지 않다고 하면 더 재수 없다. 나의 말투에서 은근히 너의 삶을 다 안다는 듯, 쉽게 산다는 듯한 뉘앙스가 새어 나왔다. 너는 질린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나의 실수다. 너는 이 질문의 의도를 읽어버렸다. 질문을 하는 나의 말투와 표정을 보고 무례하다고 여긴 모양이다. 너는 혼잣말인지 답변인지 모를 애매한 말을 뱉는다.
- 시시해서 죽어버리고 싶어.
생각지도 못한 더 재수 없는 반응에 할 말을 잃었다. 너의 눈은 여전히 흔들림 없지만 조금은 텅 비어 보인다. 나의 질문이 시시해서 죽어버릴 정도라는 걸까, 아니면 이제까지 너의 삶이 시시해서 죽어버리고 싶다는 걸까. 처음 봤을 때부터 세련된 옷차림과 행동가짐에 비해 그리 예의 바른 스타일이 아니라는 건 인터뷰 태도로 느끼고 있었다. 아마 후자일 것이다. 처음 본 상대방 면전에 대고 너의 질문이 시시해서 죽어버리고 싶다고 말할 정도로 무례할 수는 없는 거니까. 너는 나에게서 시선을 떼고 눈이 쏟아져내리는 풍경으로 상체를 틀고 커피잔을 가볍게 들어 홀짝인다.
- 이건 오프 더 레코드로 하죠. 자의인지 타의인진 모르겠지만 제 필모그래피에 관심을 가져준 건 고맙습니다. 근데 내 작품을 보고 내 삶의 굴곡을 다 안다는 듯이, 관심을 받는 지금의 내 처지가 행복한 줄 알라는 듯이 말하는 당신 태도가 좀 웃겨서요. 저는 행복한지는 잘 모르겠는데 지루하고 심심하네요. 당신 질문이 시시한 것도 맞아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는 게 느껴진다. 먼저 도발했기 때문에 감수해야 한다. 네가 주문한 커피지만 흥분을 가라앉힐 것이 필요하다. 각성제이지만 당장이라도 커피를 들이켜서라도 식혀야 한다. 쭉 커피를 마시는 나를 쳐다보는 눈길이 느껴진다.
- 당신을 멋대로 보고 판단해서 죄송합니다. 저는 그런 삶을 살아보지 않아서, 그래서…
말을 덧댈수록 구차해질 따름이었다. 그래서 변명을 관뒀다.
- 됐으니까 앞으로 인터뷰 똑바로 하세요.
카페 안의 웅성거림이 날이 선 말을 흡수했다. 고개를 들어 너의 눈을 똑바로 쳐다본다.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나의 오만함이 밝혀졌다. 너를 모르기 때문에 나는 널 이토록 부러워하고, 그 마음에 속이 울렁거리는 걸까. 이건 수치심일까. 너는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소파에서 일어나 나에게 손을 내민다.
- 오늘 인터뷰, 쓰고 싶은 대로 편하게 쓰세요. 저도 뭐 잘 한 건 없는 거 같아서 굳이 미안하다는 말은 안 할게요. 잘 가세요.
자동반사처럼 내민 손을 잡고 가볍게 쥐었다 놨다. 굳이 악수까지 할 필요 없었는데. 체면치레 할 것도 없다는 당당한 태도, 네가 날 싫어하고 미워해도 상관없다는 태도에 나도 모르게 헛구역질이 나왔다. 이건 온전히 사랑받아 본 사람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당당함이었다. 자신감. 네가 네 힘의 원천처럼 가지고 있는 사랑의 기운이 세어 나와서 나는 너무 괴로웠다. 너는 스스로 밝은 빛을 내는 태양 같은 존재고 그에 비해 나는 박살 난 소행성이다. 너를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가고 나 역시 너의 빛에 온기를 느낀다. 나는 스스로조차 사랑하지도 못해서 스스로를 잃어버렸는데, 너는 뭐가 그리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는 건지, 스스로가 괜찮은 건지, 왜 그렇게 사랑받는 건지. 인정하고 싶지 않다. 이게 나의 자격지심이란 걸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나는 내가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해 이토록 질투심을 느낀다. 너의 검은 눈동자는 비어있을지언정 흔들림이 없다.
먼저 나서는 너의 뒤통수를 따라 카페를 나선다. 너는 엘리베이터 홀로 향한다. 예의상 엘리베이터를 타기까지 함께 기다려주고 눈인사를 건넸다. 흰 눈이 펑펑 내리는 거리를 걸어 1001번 버스를 탔다. 집에 도착해서 구두를 벗고, 양말을 벗고, 손과 발을 씻고 불도 켜지 않은 채 차가운 바닥에 누웠다. 추운데 잠이 온다. 긴장감이 풀려서 그런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