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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 나는 호텔 로비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다. 너의 팔은 내 어깨를 두르고 내 팔은 너의 허리를 감싸고 있다. 창밖엔 눈이 내린다. 천장과 바닥에서 뿜어져 나오는 뜨거운 바람이 공간을 충분히 따뜻하게 데우고 있지만 너와 나는 굳이 몸을 밀착하고 있다. 방금 막 로비에서 보라색 베레모를 쓴 호텔리어에게 '704호'라고 적힌 동그란 황금색 키를 받아 든 참이었다.
구식 호텔을 리모델링한 것인지 엘리베이터는 깔끔했지만 그 크기는 조그마했다. 오래된 공간은 중간이 없다. 너무 작거나 너무 크다. 이 엘리베이터처럼. 너와 나 말고도 다른 두 명이 더 탔지만 너와 나의 숨소리만 들린다. 엘리베이터가 너무 작아서 그런 것이 틀림없다. 엘리베이터 내부는 푸른색 바탕에 금색의 아라베스크 무늬가 사방에 그려져 있다. 프렉탈 무늬 같기도 하다.
두 사람이 먼저 내리고 조금 더 넉넉해졌다. 한 발짝 떼어 옆으로 움직이니 그제야 적당한 빈 공간이 느껴진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장이 느껴진다. 어떤 에너지의 형태가 너와 나 사이로 흐르는 걸 느낀다.
층을 알려주는 표시가 6층에서 7층으로 바뀌었다. 복도 바닥에는 오트밀색 카펫이 깔려있었다. 신발을 신고 있었는데도 푹신하다. 부드러운 잔디를 밟고 있는 것 같다. 미색 벽등이 1.5m 간격으로 설치되어 물체의 형체가 겨우 구분될 정도로 어두웠다. 나는 앞장서서 걷는다. 너의 발소리가 들리지 않아서 끝없이 펼쳐진 직육면체 복도 위를 혼자 걷는 느낌이다. 결국 704호 앞에서 끝이 날 조용한 추격전 같기도 하고, 끝없이 거북이를 잡으려고 하지만 영원히 잡을 수 없는 거북이에 대한 논리인 제논의 역설이 생각나기도 한다. 너는 아마 내가 이런 상상을 하고 있는지 모를 것이다.
너는 내 어깨에 손을 얹고 한 손으로는 열쇠 구멍에 키를 넣고 잠금을 푼다. 너와 내가 들어오자 자동으로 불이 켜졌다. 말 그대로 '불'이, 커피테이블 위 난로에서 피어올랐다. 어둠이 내린 공간 속에 켜진 '불'은 우리가 집에 왔다는 감각을 줬다. 이런 걸 생각해 보면 원시적인 디테일이 원초적인 감각을 두드리는 데가 있다. 우리의 유전자 속에는 사냥을 마치고 모닥불을 중심으로 둥그렇게 모여 앉아 서로의 온기를 느끼며 여기가 '집'이라는 걸 느낀 과거가 녹아있을 것이다. 너와 내가 처음 온 이 공간에 어둠 속 불 하나를 맞이한 것만으로 이토록 아늑함을 느낄 이유는 없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순서는 정해져 있었다. 너는 침대 모서리에 자리 잡았고, 나는 샤워실로 향했다. 늘 그랬듯이 머리부터 감기 시작했다. 커피 향이 나는 샴푸로 두피를 마사지하고 물 제형의 린스를 발랐다. 양치질을 하고, 클렌징 비누로 얼굴을 씻었다. 눈에 들어간 비누거품이 매웠다. 물로 전신을 헹구고 수건으로 몸을 닦고, 부드러운 흰색 수면잠옷으로 갈아입었다. 슬리퍼를 기울여 물기를 빼고 밖으로 나왔다. 커피테이블의 난로는 여전히 타닥 소리를 내며 켜져 있었다. 잘 닦이지 않은 몸 표면의 수분이 증발하는지 공기가 차가웠다. 너는 옷장에 코트만 걸어두고 구두를 신은채 잠들어 있었다. 흔들어 깨우려고 침대로 다가갔다. 너는 본능적으로 눈을 떴다. 너는 한 손을 뻗어 나의 소매를 붙잡고 다시 눈을 감은 채 엄지손가락으로 쓸어내리길 반복한다. 소매의 부드러운 감촉에 만족한 듯 몇 번 반복하더니 일어나 샤워실로 향한다. 샤워기에서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났다. 나는 로션을 바르고 머리카락을 말렸다. 축축했던 머리카락에서 물기가 빠져나가자 몸이 나른해졌다. 머리카락을 뜨거운 바람으로 오래 말리면 머리카락 끝이 갈라져서 결이 상한다는 잔소리를 어릴 때부터 들었지만 물기가 남은 상태로 침대에 눕고 싶지 않아 바싹 말렸다. 여전히 물줄기가 쏟아져 나오는 소리가 들린다. 한 줄기의 머리카락 끝은 두 갈래로 갈라졌다. 가볍고 도톰한 이불 한 구석이 사람 모양대로 움푹 파여 있다. 이불을 들추고 미끄러지듯 몸을 밀어 넣었다.
순식간에 잠에 들었다. 너는 샤워를 마치고 샤워가운을 둘렀다. 깔끔하게 정리된 옷가지와 포근해 보이는 이불이 마음에 든다. 네가 잠깐 누웠던 자리엔 내가 있다. 아무도 눕지 않았던, 흔적조차 없이 완벽히 정리되어 있는 침대 반쪽이 기다리고 있다. 누군가 밟은 흔적 없이 깨끗한 눈이 소복이 쌓인 자리에 너의 몸을 푹 안기는 것이다. 다이빙하듯 몸을 공중에 맡긴다. 너의 다이빙에 침대가 살짝 흔들렸지만 여전히 나는 잠에서 깨지 않았다.
꿈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얼마 없을 것이다. 한 사람의 꿈과 다른 한 사람의 꿈이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된 건 내가 너를 꿈 밖에서 만났기 때문이다. 나는 인터뷰이(interviewee)로서, 너는 인터뷰어(interviewer)로서 처음 만났다. 그날은 대설경보가 발령된 날이었다. 나는 레이어드 칼라 울 재킷을 걸치고 새틴 미디스커트에 시퀸 플랫폼 샌들을 신었다. 샌들이 헐렁해서 걷는 데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연말 이맘때면 호텔 연회장에서는 패션 브랜드 행사가 열리고, 인플루언서인 나는 다양한 행사에 초청받았다. 어제는 작은 매거진에서 인터뷰 요청이 들어왔다. 마침 패션쇼가 열리는 날과 인터뷰 요청일이 같아 점심에 짬을 내어 인터뷰를 하고, 오후에 쇼에 참석하기로 했다. 근래 신경이 곤두서고 예민해진 것 같아 이참에 정신을 환기하기 위해 호텔에서 머물며 휴식하기로 했다. 26평의 방을 예약했는데 호텔 측에서 방을 업그레이드해줬다. 혼자 쓰기엔 과분한 커다란 방에서, 성인 세 명이 거뜬히 누울 것 같은 침대에 곧장 몸을 뉘었다. 창 밖에는 여전히 흰 눈이 내리고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내린다기보다 기류를 따라 내려갔다가, 올라갔다가를 반복했다. 펄펄 흩날리는 눈발을 보다가 낮잠에 든다. 아무런 꿈도 꾸지 않은 채.
어느 순간 번뜩 눈을 뜨고 핸드폰 화면을 본다. 약속된 시간까지 30분이 남아있었다. 현관 옆 전신 거울 앞에 서서 번진 화장을 수정하고, 자고 일어난 뒤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패션브랜드와 협력하여 제품을 만들 예정이라서 애프터파티에서는 이에 대한 대화가 있을 것이다. 대중은 예쁘고 어린것을 좋아한다. 정확히는 반짝이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지만. 예쁘고 어린것들은 반짝이기 때문에 대중이 예쁘고 어린것을 좋아한다는 말은 딱히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예쁘고 어린, 새것을 교묘히 섞어 포장한 시시한 나의 작품에 사람들은 열광했다. 대중이 이런 나의 레퍼토리를 알아채고 지루함을 느끼게 되면 그때의 나는 사회에서 내 그릇에 맞는 역할을 재탐색해야겠지,라는 생각을 하며 인터뷰 약속 장소인 호텔 내부 1층 카페로 향했다.
카페에는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로 가득했다. 텅 빈 공간도 무언가로 가득 채워져 있다. 가끔 너무 가득 차 있어서, 넘치는 것들을 우연찮게 밟기라도 할 때면 고요한 난장판 속에 나는 한껏 어지러워진다. 따뜻한 디카페인 아메리카노 두 잔을 주문하고 창가 옆 소파에 쓰러지듯 앉았다. 10분 먼저 도착해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건 습관이다. 가득 차있는 것들에 숨 막힐 때가 있다. 그럴 땐 귀에 이어폰을 꽂고 눈을 감는다. 때로는 공간 너머 - 거대한 침엽수에 눈이 두껍게 쌓이는 풍경 - 을 바라본다. 정재일의 Esthesia가 흘러나온다
모든 게 비워지고 음악만이 흐르는 4분이 지나가고 있었다. 다른 음악을 고르기 위해 눈을 떴다. 내 눈앞에 네가 있었다. 너는 하얀 남방에 회색 정장바지를 입고 검은 구두를 신고 있었다. 네가 걸친 것들이 깨끗하긴 했지만 태가 어설펐다. 디테일은 명품을 만든다. 하지만 너의 어수선한 옷차림은 사랑스러운 데가 있었다. 젊어서 그런가, 어설프게 악수를 건네는 모습이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것을 증명하는 것 같았다.
글쎄. 나는 언제부터인가 내 삶이 버거워지기 시작했다. 능력밖의 행운을 연속해서 누렸기 때문이다. 내 삶이 꿈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정말 쫓을 수도 없을 정도로 격차가 벌어져서 언제 이 운이 다할지 조마조마했다. 내 실력이 부풀려져서 사람들은 내가 엄청난 실력을 가진 줄 알고 있지만 사실 나의 실력은 거품이라는 걸 안다. 아니, 내 실력이라고 할 만한 것이 있나? 내가 가진 운은 일에 대한 실력이 아니라 시대를 읽는 감각에서 온 것이었다. 몇몇 비평가들은 이미 알고 있다. 이 분야에서 나의 실력은 별 거 없는데 시대를 잘 타고났다고 아주 조심스럽게 - 현재 여론이 나에게 긍정적이기 때문에 - 언급한다. 나도 노력이란 걸 해봤다. 다른 '진짜'들이 주는 감동을 나 역시 줄 수 있도록, 나 역시 그런 사람이 되도록 꾸준히 성장한다면 언젠가 들통날지도 모른다는 이 불안감을 내려놓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하는 노력은 현재 누리고 있는 명성만큼 도달하려면 평생을 가도 부족했다. 그러니 나는 영원히 불안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여전히 사람들은 내가 내는 작품들에 환호를 하고, 무의미해 보이는 것에도 의미를 부여하며 나를 추켜세운다. 사실 내가 한 것이라고는 대중의 상상을 자극한 것 밖에 없다. 그들 좋을 대로 해석하도록 여지를 남겨두는 것. 내가 읽은 시대는 상상력이면 충분하다. 낙천적 상상력 말고, 자신감으로 위장한 낙천적 상상 말이다.
나의 현실은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답답하다. 나는 이들을 속이지 않았지만 이들은 부풀려진 내 모습을 좋아하고 있다. 이토록 극심한 이상과 현실의 괴리는 꿈으로 도피하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