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해지기.

방어기제는 스스로를 알아가는데 도움이 안 된다.

by 이오십

솔직해지는 건 어려운 것 같다. 누구나 다 그렇겠지만 특히 나는 솔직하게 스스로를 드러내는 게 어렵다.


#1

독립책방에 들러서 책을 고르는데 책방주인이 대화하면서 책을 골라주셨다.


- 사람들과 대화하는 게 어려운데 추천해 주실 책이 있나요? 스스로 드러내는 게 두려워서 관계를 오래 이어나가지 못하겠어요.

- 뭐 언제 상처받은 기억이 있나요?

- 인간관계에서 자신이 나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고 할만한 사건이 있었죠.


-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가 있나요?

- 음.. 가족이요?

- 왜 가족이에요?

- 음… 음…. 모르겠어요. 그냥 가족인 것 같은데요.

- 잘 생각해 보세요.


두루뭉술한 대화 끝에 책방주인은 책 추천과 함께 방어기제, 솔직하지 못해서 어려운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 근데 솔직하지 못한 거 이기적인 거예요.


난 생각보다 나를 몰랐다. 이제껏 그랬던 것처럼 유예하고, 미루고, 연장하고… 그러고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살고 싶은지도 모르겠고, 모르겠고 모르겠고… 이렇게 말하면 바보 같을 수 있어도 속물 같지도 않고, 비겁해 보이지도 않고 차라리 회색지대의 인간이 되는 것이다. 단점도 보이지 않고 의뭉스러울지언정 미워할 가치도 없는 사람이 된다.


좋아하는 걸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도 어려워서 혼자가 좋다고 믿었고,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게 두려워서 스스로 지칠 때까지 기다렸다.

나는 스스로를 잊어갔다.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핵심 가치가 뭔지, 좋아하는 건 뭔지, 그리고 정말 싫은 건 뭔지 생각도 감각도 게을러진다. 방어기제가 강해질수록 내 마음은 이게 아닌데, 몸은 아무 방향으로 움직인다. 가끔은 갑자기 세상에 억하심정이 들 때도 있다. 내가 하고 싶은 건 이건데, 그 한마디를 못해서 몇 년을 미루다가 겨우 시작한 일들이 꽤 있다. 하고 싶은 걸 하고 싶다고 말을 꺼내면 너무 가벼워 보일까 봐, 비웃을까 봐, 누군가가 내 마음을 흔들까 봐 겁이 났다.


#2

근데 이기적인 것 같다. 한 번도 이런 태도가 이기적이라고 생각해보지 못했는데 주변 사람들을 나쁜 사람으로 만드는 태도였다.

내가 좋다는 걸 네가 싫을까 봐 감춘다는 건 내가 너를 배려하는 게 아니라 내가 널 속이는 것이었다.

네가 이해하지 못할까 봐 그랬다는 건 너를 더 속 좁은 인간으로 만드는 일이었다.

네가 이런 나를 사랑하지 않을까 봐 그랬다는 건 내가 너를 마음대로 판단 내린 행동이었다.


아주 교묘하게 스스로를 속일 때도 있는데 이제부터는 강한 부정을 하면 긍정인지 생각해 보기로 한다.


#3

진심을 보여주면 내가 상처받을까 봐 겁나서 그랬던 것 같다. 친구관계에서 매듭짓지 못한 기억이 흔적기관처럼 남았다. 말 그대로 흔적만 남아서 그 이유로 지금까지 이러고 있는 게 우습지만 무섭다. 어쩌면 우습다는 것도 방어기제일지도 모른다.


좋아하는 걸 좋다고 말하기. 이건 생각보다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고, 생각보다 조금만 필요한 일도 아주 조금 있다.

이를테면 글쓰기를 좋아한다고 말하기, 가끔 혼자서 코인노래방 가는 걸 좋아한다고 말하기, 밴드음악을 좋아한다고 말하기, 아이돌을 좋아한다고 말하기….


올해는 스스로에게 솔직해짐으로써 자아와 현실의 내가 타협점을 찾아가는 과정이 되었으면 좋겠다. 일단 오늘 좋았던 것, 나는 사진 찍는 것도 찍히는 것도 좋아한다. 사람들을 알아가는 과정도 재미있다.

이전 15화감자수프 끓이는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