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risis - 엔니오 모리코네
어두운 방에 주황빛 조명 하나를 켠다. 책상에는 따뜻한 돼지감자차가 준비되어 있고 키보드 앞에 앉아 이리저리 글자를 조합한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도 아니고 온전히 나를 위해 쓰기로 마음을 먹는다. 욕심을 버리고 지금 내 마음이 이야기하는 대로 그대로 적을 것을 다짐한다. 지금 가장 하고 싶은 이야기를 손가락으로 적어낸다. 오늘은 소수에 대한 이야기다.
대학교 4학년 때 조별과제가 있었다. 4인 1조가 되어 리노베이션 플랜을 구상하고 건물을 설계하는 프로젝트였다. 조별과제에서 가장 중요하지만 난감한 부분은 조를 짜는 일이다. 무리를 이루던 사람들은 4인에 맞추어 조직을 개편하기 위해 이리저리 이야기가 오가느라 바빴고, 혼자 다니는 사람들은 4인그룹을 능동적으로 조직할 충분한 인맥이 없어서 남은 인원을 눈으로 좇느라 바쁘다.
나는 확실히 후자 쪽이었다. 어느 무리에서는 자신이 이쪽 팀으로 가네, 자신이 왜 여기 팀으로 옮겨야 하느냐, 이런저런 갈등 내지는 조정과정이 있을 때 차라리 혼자여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와중에 먼저 짝지은 두 사람이 팀합류를 제안했고, 이어 남은 한 자리는 다른 팀들이 모두 구성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남은 사람을 영입하기로 했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유학생 한 분이 우리 조에 합류하게 되었다. 우리 조 구성원은 이전에도 2인 1조로 조별과제를 했던 두 사람과 혼자였던 나, 그리고 미지의 복학생이자 중국에서 온 유학생 이렇게 네 명이 되었다. 네 명이서 어색하고도 조촐한 첫 식사와 함께 잘해보자는 열의를 다졌다. 한국어를 잘할 줄 모른다는 중국인 유학생의 겸손한 발언에 ‘아아, 괜찮아요. 괜찮아요. 서로 노력하면 되죠.’ 이런 따뜻한 말이 오가는 저녁이었다. ‘모르는 거 있으면 물어봐도 돼요?’라는 그의 말이 우리의 앞날에 대한 예언이자 전조였으니… 그때 그 말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우리는 알지 못했다.
우리 조의 특징은 서로 배려하고 성실한 분위기였다. 아침 일곱 시에 만나서 회의를 한 적도 있고, 새벽 3시까지 회의를 하고 집에 가니 4시가 되었던 적도 다반사지만 우리는 서로 다독이며 힘을 냈다. 그리고 이런 생활을 월화수목금토일… 반복했다. 토요일은 물론 일요일에도 만나서 이야기하고 과제를 했다. 뭔가 야근에 야근에 추가근무를 미리 경험하는 것 같았다.
과제는 어렵다기보다 할 일이 많았다. 3d 모델링도 해야 하고 지적도를 현황에 맞게 수정해야 했고, 그 마을의 지역적 특징과 역사, 인구 분포 등 정보를 수집해야 했다. 이 모든 정보들을 수렴하여 매주 30장에서 60장에 달하는 발표자료를 만들어냈다. 객관적으로 뛰어난 결과물을 내는 팀은 아니었지만 빠지는 것 없이 꼼꼼하고 성실하게 진행했다.
팀플레이에서 만족감과 성취감, 더 나아가서 이 팀에 내가 기여했다는 자랑스러움의 정도는 개개인의 기여도에 달려있었다. 팀에서 한 역할이 많으면 많을수록 팀 내에서 목소리가 커지고 권력이 생기는 것이다. 일을 잘하면 인정받을 수 있고, 사람들의 호감은 권력이 되기도 한다.
자, 이제 우리 조의 권력분포를 살펴보기로 하자.
공교롭게도 한국 대학교에 다니는 한국 대학생의 팀 내 기여도가 30%, 30%, 30%였고. 유학생의 기여도는 10% 정도라고 표현할 수 있겠다. 외국에서 살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는 매 순간 도전과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이지만, 함께 과제를 할 때 한국인인 우리와 같은 노력을 해서 자료조사를 해도 비교적 적은 정보를 얻을 수밖에 없다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 모두 그 사실을 실감하게 되자 조금씩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그에겐 한국말이 모국어가 아니기 때문에 자잘한 소통에도 한계가 있었고, 그가 해 온 과제의 일부는 블로그나 홈페이지에 나온 자료를 긁어모은 것에 불과했다. 이에 더불어 지난 학기 때 그의 과제에 대한 평이 최악이었다는 - ‘이게 3학년이 할 수준이냐’라는 말을 교수에게 들었다고 한다. - 그의 역사를 건너 듣기도 했다. 하지만 회의 때 그의 출석률은 우수했다. 결석을 해도 친한 동생과 약속이 있어서 그날 저녁은 시간이 되지 않는다, 이렇게 먼저 말을 해줬기 때문에 그의 결석에 대해서는 부럽긴 해도 화가 나진 않았다.
다만 남은 세 명이 그의 태도에 대해서 분노한 점이 있다면 역할을 분담할 때 ‘나는 할 줄 모르기 때문에 너희가 해줘야 돼’,라는 태도를 취한다는 점이었다.
- 헤이, ㅇㅇ, 이건 어떻게 하는 거예요?
- 헤이, ㅇㅇ. 이걸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 헤이, ㅇㅇ. 자꾸 물어봐서 미안한데 나 이거 할 줄 몰라요.
그렇다, 그는 물음표 살인마, 핑거 프린세스(궁금증을 스스로 검색하여 해결하지 않고 무지성으로 질문하는 사람)... 였다. 그렇게 그와 과제를 하다 보면 처음엔 그의 질문에 하나하나 대답해 주고, 도와주다가 결국엔 나머지 세 사람의 손을 거치게 되어있었다. 그 혼자 해낼 수 있도록 시간을 두고 기다리기엔 과제 제출 기간은 매번 휘몰아쳤다. 과제를 할 때 자신이 직접 끈기를 가지고 해결하거나 질문에 적극적으로 답을 하는 일이 없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그에게 기대를 하지 않게 되었다. 그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 말이다. 그렇게 그의 이미지가 만들어지고 나니, 그가 던지는 질문은 자신의 평판을 유지하기 위해서, 또는 당장의 면피를 위해서 하는 질문으로 느껴졌다.
조원 중 한 명은 그가 이렇게나 수동적이고 하려는 마음이 없는 것 같아서 화가 나는데, 한편으로는 그가 가진 어려움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에게 너무 실망스러워서 화가 난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끝내 왜 당신은 직접 알아보려고 하지 않느냐며, 답답함에 눈물을 쏟았다. 유학생 분은 안절부절못하며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안타깝게도 그는 왜 우는지 이해하지 못한 분위기였다. 대화는 점점 웃기게 흘러갔는데,
A -ㅎㅎ님, 이해 못 하셨죠. 제가 왜 우는지.
ㅎㅎ님 - 아냐, 알아. 내가 못해서 그런 거잖아.
A - 아니, 그게 아니라. ㅎㅎ님이 못하는 건 상관이 없는데, 자꾸 스스로 알려고 하지 않고 그냥 다 물어보니까 제가 너무 지쳐서 그래서 울었어요. ㅎㅎ님이 잘못한 건 없어요.
왜인지 이 대답을 듣는데 속이 답답해졌다.
A - 내가 ㅎㅎ(중국인 유학생 분)님이랑 이야기하다 보면 그 사람한테서 답답함을 느끼는 내가 나쁜 사람 같아. 나 진짜 나쁜 건가.
나. -. 그 생각과 걱정과 고민을 하게 한 상대방이 너한테 나쁜 거지 네가 뭐가 나빠. 나를 힘들게 하면 나한테는 나쁜 사람인거지.
결국 ‘모르는 거 있으면 물어봐도 돼요?’라는 말이 불러온 파국의 결론은 ‘우리 팀은 3인조라고 생각하고 덤이 있다고 생각하자’였다.
A - 사람이 나쁜 건 아닌 거 같아요.
- 그냥 안 해봐서 모르는 게 많고, 적극적으로 해볼 생각이 없는 거지 그래도 회의 때는 꾸준히 나오잖아요.
나. - 타국에서 유학생활하는 거 대단히 수고스러운 일이지만… (우리에게 그는) 지금 며칠 째 혼자 일찍 들어가는 나쁜 사람 아닐까요…?
(마감일이 될수록 ㅎㅎ님이 담당할 수 있는 일이 줄어들었다. 그 이유는 할 줄 아는 게 없기 때문에…)
B - 그럼 응원단장..이라고 생각하면 될까요.
추후에 남은 세 명은 이 결괏값에 대해서 우스갯소리를 한다.
A - 어쩌면 ㅎㅎ님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 조는 결속력이 있었던 것 같아요. 다른 조는 다섯 명이어도 빠듯해했는데 우리 조는 단 한 명이라도 빠지면 우리 조는 파멸이라는 생각에.. 그렇게 서로를 의지하면서 버틴 것 같죠?
B - 그렇죠. 비교하긴 뭐 하지만 다른 조는 서로 더 좋은 의견을 내고, 자기주장을 펼치느라 갈등이 있었는데 우리 조는 그럴 새 없이 협조, 협력의 과정이 다였잖아요.
A - 어떻게 보면 정말 구심점이었네요, ㅎㅎ님은.
‘(3인+덤) 조’라는 극강의 가성비를 낸 이 프로젝트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성적을 냈다. ㅎㅎ님은 학기말이 될수록 점점 소심해졌다. 팀 내에서 활약한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전체 큰 마을 모형의 콘타를 나와 다른 조원분들이 맡아 짰고, 크기와 순서에 맞게 조립을 해야 해서 모형 조립은 내가 주도했고 조원 전원이 함께 도왔다. 패널작업은 포토샵을 잘 다루는 A가 맡아했고, 다른 조원 B는 모형을 도우면서 패널에 넣을 다이어그램을 작업했다. 유학생 ㅎㅎ님은 반복과 노가다성 작업이지만 가장 단순한 작업인 건물 모형을 글루로 붙이는 일을 하셨다. 중간 평가 때의 역할분담이 기말 평가 때도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 나는 도면과 모형, 다른 조원 두 분은 도면과 패널, ppt 자료 정리, 영상 작업, 유학생 분은 가장 단순한 작업.
가끔 이렇듯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상황에 의해 움츠러드는 경우가 있다. 무용하다고 느껴질 때, 부적응 기간이 길어질 때,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이 소수에 속할 때. 소속한 그룹에서 소수에 속하는 사람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 걸까. 아마 유학생 분도 엄청나게 불편했을 것이다. 자신도 잘하고 싶은데 마음만큼 안 돼서 답답하기도 하고, 힘들었겠지. 한편으로는 조원들의 눈치도 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내가 만약 ㅎㅎ님이었다면, 용기 내어 조원들과 더 친밀해지려고 노력했을 것 같다. 그러면 조원 개개인의 특성을 더 자세히 파악했을 것이고, 자신의 부족한 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대화를 시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이해받거나, 스스로 팀을 위해 노력할 수 있는 지점을 찾아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말은 늘 쉽다. 내가 ㅎㅎ님이었어도 방금 말한 바와 같이 생각하고 시도하기보다 게으르게 ‘몰라, 몰라. 알려줘.’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ㅎㅎ님이 그렇게 행동했다고 내가 비판할 수는 없다. 하지만 ㅎㅎ님과 함께해서 편안했다고는 말 못 하겠다.
한편으로는 같은 배를 탄 조원으로써 나는 ㅎㅎ님에게 어떻게 행동했으면 좋았을까. 먼저 무조건 수용하고 이해하기보다 우린 동등한 학습자임을 인지하고 존중했어야 한다. 그가 한국어가 낯설 뿐이지 중국어로 대화했다면 그도 우리만큼은 했을 것….이다. 왜 망설였냐면 그는 좀 게으른 부분이 있었기 때문에. 어쩌면 한국인이 광적으로 부지런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리고 나 역시 그에게 도와달라는 말을 자주 꺼냈으면 좋을 것 같다. 어쩌면 나도 오만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당연히 그보다 내가 더 낫겠지, 내가 하면 더 빠르겠지 하는 그런 오만한 생각. 모형을 만들 때 콘타를 짜는 일을 처음엔 알려주더라도 같이 했더라면 아마 모형 조립할 땐 그가 더 수고를 해줬을 수도 있다. 결과적으로는 내가 다 콘타를 짰고 나는 3일 밤을 새우다시피 몸을 갈아 넣었다.
우리의 조별과제는 미숙했고 어쩌면 모두가 말하듯이 조별과제는 사회의 악일지도 모른다. 팀원 내 누군가가 지뢰일 수도 있다는 긴장감과 함께 시작해 모든 일의 진행이 조율과 양보 속에 진행되어야 한다. 우린 같은 걸 보고 있지만 다르게 생각한다. 사회에서 살아가는 건 매 순간 조별과제다. 나는 조별과제가 긴장되고 두려워서 도망치고 싶었다. 근데 도망쳐도 또 다른 조별과제가 기다릴 뿐이었다. 결국은 뚫고 지나가는 과정인데 조별과제… 정말 쉽지 않지만 과정에서 웃게 되는 일도 많았다.
이번 학기에도 조별과제가 있다. 나 역시 과거에 ‘내가 나서서 해결해야 한다.’는 오만함을 내려놓고 내가 다 나서서 해결하려고 동분서주하기보다 조원들과의 소통에 참여도를 높였다.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을 믿고, 팀을 잘 활용하면 더 효율적이고 몸과 마음이 편해진다는 걸 이번 과제로 배우고 있다. 과거의 나는 말없이 해결하는 게 멋지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행동했었다. 근데 적당히 모르는 건 물어보고 겸손하게 구는 것도 필요한 것 같다. 자존심 세우다가 결국 타임아웃되는 경우가 있다.
다시 한번, 겸손한 마음으로 친절하고 다정하게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