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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오십 Nov 30. 2023

세계관 수업, 100시간 추가.

Savage - 에스파

요즘 레드벨벳 chill kill이라는 곡을 자주 듣고 있다. 뮤직비디오를 보면 레드벨벳 멤버들이 연기를 하면서 상징하는 것들이 잔뜩 있고 이야기가 나온다. 그 곡에서 레드벨벳 멤버 다섯 명은 한 아버지를 둔 다섯 자매이고, 아버지의 학대로부터 벗어나려는 것처럼 보인다.


에스파의 음악도 각 곡마다 담당하고 있는 이야기의 뼈대가 있다. Black Mamba, Next Level, Savage, Girls 앨범에서 쭉 이어지고 있는 스토리라인이 있고, 멤버들은 뮤직비디오에서 연기도 하고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 아무튼 다 한다. 에스파의 세계관에서는 디지털과 아날로그 세계 사이의 '나'가 있고 교류가 가능하다는 게 설정이다.


요즘 아이돌 산업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 덕질을 더 깊게 하게 만들고, 일종의 재미 요소 - 인 '세계관'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는 날이다.



 사람들을 만나면 가장 최근에 많이 하는 생각을 묻게 된다. '요즘 무슨 생각하고 지내?', 혹은 '요즘 고민이 있어?', '요즘 관심사가 뭐야?' 이런 식으로 말이다. 사람들마다 하는 대답은 다양하고 천차만별일 것이다. '요즘 하고 있는 일이 너무 힘들어.', '멀티비타민 외에 다른 비타민을 더 먹고 싶은데 뭘 먹을지 생각 중이야.', '다이어트해야 하는데 밥이 너무 맛있어.' 등등.... 이런 질문들로 얻을 수 있는 건 상대방의 세계관이다. 그 사람을 이루는 가장 최근의 생각들. 이런 걸 묻는 이유는 친교의 목적이고, 대화를 하면서 나를 돌아보게 될 때도 많다. 나의 경우는 '돈을 벌고 싶다.'이다. 


 사람을 이야기의 소설 속 등장인물로 보고 특성을 정리하다 보면 어떤 일의 인과관계가 보이기도 하고 오해했던 일도 금세 풀리게 된다. 그리고 나와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면 주파수가 같은 사람을 만난 것 같아서 매우 반가워진다. 하지만 공통점을 찾기 어려운 경우 하나의 안건에 대한 의견이 첨예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일주일에 아르바이트를 3개 하고 편의점에서 삼각김밥을 먹는 지방대학생과 서울에 자가가 있고 자차로 회사로 출퇴근하는 9-6 직장인의 당장의 관심사는 다를 것이다.


각자의 고민에 경중을 따지는 건 무의미한 일이고 끝이 없는 불행배틀의 시작이다. 그러니 조심스럽게 서로의 세계관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대화의 기본이다. 서로의 세계관을 존중하기 위해서는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파악하고 있다면 우리는 좀 더 밝게 서로를 향해 인사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가끔 너무 대화를 한지 오래돼서 시작부터 상대방이 배부른 소리 한단 생각이 들 수도 있다. 배부른 소리를 한다는 생각이 드는 건 상대방이 나보다 사정이 낫고, 현재의 나에겐 없는 고민을 미리 하고 있단 뜻이기도 하다. 그럴 땐 상대방이 부러운 나머지 얄밉다는 감정이 생길 수도 있지만 조금 더 내 처지를 알고 배려할 수 있도록 내 상황을 어느 정도 공개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수도 있다.


예를들어,


 언니는 학교 선생님이다. 어느 정도 일에 적응을 했고, 그 자리까지 가려고 많은 노력 - 임용고시 공부, 면접준비, 시험준비, 수능.... 모르겠다. 아무튼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수많은 경험들 - 을 했다.

 나는 경제력이 0인 사회 초년생이다. 앞으로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지금까지 내가 한 노력들은 어떤 결과를 맞이할지도 모르겠다. 원하는 결과를 받아볼 수 있을지도 장담하지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 언니가 나에게 '남자친구'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면 '진로'에 대해 고민이 더 큰 나는 별로 관심이 없을 수밖에.



 서로의 세계는 다른 방향으로 확장되어 가고 있다. 사람은 사람 하나하나하나의 우주다.라는 말에 깊이 공감한다. 빅뱅이라는 사건에 의해 우주는 하나의 점에서 퍼져나가고 있다. 같은 시간을 살고 있지만 몇 시에 기상을 하는지, 일어나서 밥은 무엇을 먹는지, 아침운동을 하고 출근을 하는 것인지, 도서관에 간다면 어느 도서관으로 가는지... 대화는 웜홀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알기로 웜홀은 사과를 지렁이가 먹으면서 사과의 한 표면에서 다른 표면으로 이동하는 걸 의미하고, 더 정확히는 우주공간의 블랙홀과 화이트홀을 연결하는 가상통로이다. 과학을 비과학적인 비유에다가 쓰는 게 불편할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하고픈 말은 우리는 각자의 신체를 가지고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데 서로에 대한 질문이 자주 오갈수록 우리는 연결될 수 있다는 말이다.


세계관은 다 다를 것이다. 장르도 다를 것이다. 세계관은 시간이 지나도 유지되는 하나의 설정값이고(어떤 큰 사건에 의해서는 변화-성장/퇴보-할 수 있음), 장르는 시간에 따라 본인이 느끼는 삶의 양식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서로의 세계관을 공부하는 건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에 대한 연민이 생겨나고, 우리의 세계가 확장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인문학 공부를 이야기하면 책을 추천하지만 나는 아이돌 덕질을 추천한다. 세계관.. 꽤 재미있다. 그리고 어떤 세계관에 대해 본인이 갇혀있다고 느낄 때, 정체되어 있을 때 내가 가지고 있는 고민을 터 놓고 이야기하는 것만큼 효과적인 치료법은 없는 것 같다. 어떤 답장을 받지 않더라도 글을 써서라도 표현해 내면 내가 가진 생각이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는지 알 수 있기 때문에 글로 나의 세계관 설정값을 써보는 것도 추천한다.



 이를테면 나는 


후진국에서 선진국으로 향해가는 길목에서 성장판이 닫히고 있는 2023년 대한민국에서 대학생으로 살고 있고, 

현재 재산은 중학생 때부터 할머니, 할아버지 집에서 받은 용돈들이 전부이며, 술과 담배는 하지 않는다.


피아노 학원, 태권도 학원을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다녔으며

한자학원, 수학학원을 초등학교 고학년 때 다녔고,

유치원 때 잠깐 영어유치원을 다닌 적도 있고, 미술학원도 다녔으며 사생대회도 나갔었다.


초등학생 고학년 때 정보영재교육원에서 코딩의 기초를 배웠었고,

중학생 때 과학고등학교 부설 영재원을 다녀서 과학고등학교에 가고 싶어 했었지만 못 갔고,

고등학교 3학년 때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다.


부모님과 언니와 나라는 4인 핵가족에서 현재는 1인가구로 살아가고 있고,

현재는 헬스를 멈추고 요가학원에서 유연성을 기르고 있다.


부모님은 아직도 맞벌이 자영업자이며, 코로나로 큰 타격을 받았다.

하지만 성실하게 일해온 날들은 그들이 바로 무너지게 두지는 않았다.


메르스, 코로나, 이태원 압사사고, 세월호 사건, 박근혜 정부 퇴진 운동, 공교육 멈춤의 날 등과 같은 사회적 사건을 겪었고,


내가 늙어도 국민연금을 필요할 때 필요한 만큼 받을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이 있으며,

나이 들어가는 부모님이 더 나이 들기 전에 같이 해외여행을 멀리 가보고 싶다는 소망이 있으며,

취업과 결혼이 내 인생에서 꼭 필요한 사건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일'을 가지고 노동하는 건 인생에서 꼭 필요하다는 걸 인지하고 있다.




이런 '나'의 세계관에서 '돈을 벌고 싶다.'는 나의 욕망은 어떤 뿌리를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애정을 가지고 있는 존재인 부모의 힘듦을 내가 나눠 들고 싶다는 바람, 하나의 독립된 개체로 성장하고 싶다는 욕망. 하지만 쉽게 해소되긴 어렵다고 본다. 요즘 건축설계 시장이 불경기이고 더 나아서 현재 사회는 사람들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으며, 하나의 안건을 모으기 위해 오래 대화하지 않는다.

 '주 69시간 근무제' 건만 해도 그렇다. 사회에서 실제로 일하는 사람들은 대체 69시간이 어디서 나온 숫자인지, 그렇게 일하면 죽는다고 말하는데 69시간 근무제를 추진할 수 있는 키를 쥔 사람들은 그걸 모른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건지, 아니면 그냥 모르는 것인지 대화해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말이다. 주 4일 근무제도가 어서 대중화되었으면 좋겠다.

아, 다시 생각해 보니 69시간 근무제는 1000명 중 단 한 명의 생각이었을 뿐인데 그 말 자체가 너무나 다른 세계관에서 나온 생각이라서 충격적이었을 수도 있겠다 싶다. 대체 그런 생각을 하려면 나는 어떤 삶을 살아왔어야 할까 궁금해진다. 내가 모르는 다른 세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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