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든 인내와 사고의 관계
"참을 인 자 세 번이면 살인도 면한다." 우리는 어릴 적부터 종종 인내를 강요당하며 자라 왔다. 나는 이 '무조건적 인내'가 우리나라에서 불필요하게 미화되어 너무 많은 사람들이 존경할 만한 것으로 오해하고 있으며, 타의가 아닌 자의로 가장 효과적으로 스스로를 옥죌 수 있는 일종의 사회적 장치라고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추대하는 인내는 무조건적이며 병적인 참을성이 대다수이기 때문이다.
이런 참을성을 일생일대의 자랑거리나 업적인 것처럼 떠벌리고 있는 인간들이 세상엔 너무나 많다. 얼마나 자랑할 일이 없으면 허구한 날 '나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바보예요.'라는 걸 동네방네 광고하고 다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 자신만의 자랑거리가 지극히 창피한 일인 것 조차 모르는 극도로 무지한 인간들이 너무나 많아 배로 충격적이다. 병든 인내는 존경받을 것이 아니라 마땅히 고쳐져야 한다.
'참는다'라는 말 앞에는 구체적인 정황과 정당성이 뒷받침되어야 하며 사고(思考) 없는 참을성은 신경을 곤두세워 경계해야만 한다. 열악하고 부조리한 상황에서도 아무 생각도 없이 일방적으로 참고 견뎠다는 것, 그건 으스대며 자랑스럽게 얘기할만한 이야기가 못된다. 이렇게 형편없는 일들이 부지기수로 일어나는 것은 그만큼 요즘에는 절대적으로 적은 수의 인간만이 사고하며 산다는 것을 보여준다.
김남주 시인의 <어떤 관료>에서는 사고하지 않는 관료의 모습에 대해 언급한다.
그 관료에게는 주인이 따로 없다!
봉급을 주는 사람이 그 주인이다!
개에게 개밥을 주는 사람이 그 주인이듯
일제 말기에 그는 면서기로 채용되었다
남달리 매사에 근면했기 때문이다
미군정 시기에 그는 군 주사로 승진했다
남달리 매사에 정직했기 때문이다
자유당 시절에 그는 도청 과장이 되었다
남달리 매사에 성실했기 때문이다
공화당 시절에 그는 서기관이 되었다
남달리 매사에 공정했기 때문이다
민정당 시절에 그는 청백리상을 받았다
반평생 국가에 충성하고 국민에게 봉사했기 때문이다
나는 확신하는 바이다
아프리칸가 어딘가에서 식인종이 처음 들어와서
우리나라를 지배한다 하여도
한결같이 그는 관리 생활을 계속할 것이다
국가에는 충성을 국민에게는 봉사를 일념으로 삼아
근면하고 정직하게!
성실하고 공정하게!
김남주 <어떤 관료>
시인은 어떤 무사고(思考)의 '개'와 같은 관료에 대해 객관적인 어조로 표현하고 있다. 그 관료는 매사에 성실하지만 아무런 사고 없이 오로지 주인만을 좇을 뿐이다. 봉급을 주기 때문이다. 주인 이외의 것들에 대해서는 고려하거나 주저할 필요가 없다. 봉급을 주기 때문이다.
나의 주인, 단 한 가지만 생각한다면 인생을 훨씬 편안하고 단순해질지도 모른다. (짐승임을 인정함과 동시에 인간임을 포기한다면 말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인간이기에 사고해야 한다. 사고는 선택이 아닌 인간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저 관료의 주인이 조금이라도 생각(인간으로서의 사고)을 가지고 있다면, 절대 저 관료를 채용해서는 안된다. 일방적인 Yes를 외치는 사람에게는 Yes 그 이상의 어느 것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관료에게 관료의 역량 이상을 발굴해내기 위해서는 Why를 물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어색한 의문사, "왜" 말이다. 왜 Yes인지, 왜 No 인지, 문제 해결을 위한 How는 무엇인지 이런 당연하지만 당연시되지 않고 있는 명백한 질문들 말이다.
또한 설령 그 관료가 다른 집단에서 무언가를 견디지 못하고 나왔다 하더라도, 삐뚤어진 시선의 왜? 가 아닌 진짜 연유를 물었어야 한다. 관료는 어떠한 노력을 해봤지만 그에 대해 어떤 부분에서 정당하지 않은 대우를 받았고, 더 존중받으며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얻기 위해 어렵지만 떠나왔노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진솔함이 게으름이나 끈기 없는 모습으로 변질되지 않고, 개선 가능한 일들을 찾아가는 데에 초점이 맞춰질 수 있도록 쌍방으로 노력해야 한다.
참는다는 것, 이미 병들어버린 인내에 대해서 사회적으로 너무나 긍정적으로 해석되고 있지는 않은지 꼭 한번 다시 思考해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