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랭 드 보통의 <불안>을 읽고
현대 사회에서의 능력주의에 대한 의의는 지위와 부, 가정환경 등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배경과 관계없이 능력에 따라 얼마든지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할 수 있다기보다는, 성공과 실패를 확실히 구분 짓고 그에 대한 이의(异议)를 말살시키려는 데에 있다. 그래서 현존하는 능력주의는 무엇보다 '표면적인' 능력주의이며, 성공한 사람(현대판 능력주의를 기준으로 '성공'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쥔 사람)에게 각종 스포트라이트와 위인 의식(스스로 만든 성공이라는 자부심 까지도), 누릴만한 '자격'을, 실패한 사람에게는 실패의 정당성(노력 또는 끈기 부족)을 제공한다. 이러한 의식의 흐름 속에서 스스로의 불행은 스스로의 잘못으로 야기된 것이며, 그것이 정당화되어 어떠한 사회 구조의 모순에 대해 생각해 보는 여지를 없앤다.
이러한 관념에서 자본주의의 부와 가난을 때에, 비싸고 좋은 저택을 소유한 자는 도덕적인 면과 개인의 재능이 충분한 자이며, 가난한 자는 도덕적으로, 스스로의 의지에 있어서도 결함이 있는 자가 되기 마련이다.
너무나 모순적인 것은 '능력주의'를 인정하며, 이미 존재하는 '자본'의 불균등한 분배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 것인데, 이는 곧 자본이 능력주의에 미치는 영향을 간과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방적인 사고방식에 저항하고 반항하기에는 현대인들은 이미 너무나 고달프며 철저히 나약하다.
서양에 비해 공동체 생활을 중시하는 동양에서 사람들의 머리 속에 어처구니없는 기준과 생각들을 때려 넣기란 참으로 간단하다. 공동체 생활이 기반인 사회에서 사람들은 누구보다 '튀는 것'을 두려워하며, 항상 스스로를 '사회적' 인간으로 꾸며내려 애쓰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고작 내세울 동양 현대 사회의(특히나 이익집단 안에서) '정'이라는 것은 속박과 구속을 표면적으로 거창하게 치장하기 위해 사회로부터 강요된 수갑 정도라고 밖에 생각할 수가 없다.
이렇게 마음과 마음이 교차하는 개념이 아니라,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인 희생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것이 현대 사회 인위적 조직들의 '정'이며, 나의 세계만 있을 뿐 타인의 세계는 파괴당해도(파괴당하면서도 어떠한 표현도 티도 바깥으로 표출하지 않는) 괜찮은 것이다. 다르게 생각해 보면, 나의 삶을 위해 타인이 일방적으로 희생해 주며, 나의 생활을 조금 더 즐겁게(윤택하게) 만들어 주는 수단적 역할을 하는 것이 인간다움과 따뜻함을 표현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또한 폭력의 일종임을 누구도 차마 입 밖으로 꺼내놓지 못한다.
때문에 현대인의 불안은 근원은 이렇다 할 만한 이유로 하여금 발생하는 일시적 불안이 아닌, 구조와 모순에 상응하는 대응을 할 수 없는 답답함에서 나오는 고질적 불안이며, 불필요하지만 불필요하다고 여기는 순간 스스로는 도태된 인간으로 치부당할 수 있는 불안을 또 자아낼 수도 있기에, 필연적인 감정 소모의 일부분이 되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