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 결혼식 참석을 위해 한국에 다녀온지 얼마 지나지 않아 친정엄마는 하나 뿐인 손녀딸이 보고싶으시다며 난생 처음 발리에 있는 우리 집에 오셨다.
싱가폴에 살 때 친정엄마의 방문은 반갑지만 동시에 우리의 집이 얼마나 좁은지 절실하게 느끼게하곤 했다. 달랑 방 한 칸에 거실 겸 주방. 밤이면 우리 세 식구가 방에서 복작거리며 자고 엄마는 거실 겸 주방에 간이 매트리스를 깔고 주무셨다. 낮엔 또 어떠한가. 나는 방에서 재택근무를 했고 엄마는 하원한 손녀딸과 놀아주며 거실에서 시간을 보내다 남편이 일찍 들어온 날이면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사위와 어색하게 거실 겸 주방을 공유하며 오후 나절을 보내야했다. 그에 비해 발리 우리 집은 훨씬 낡았지만 방도 세 개나 있고 화장실도 세 개라 나름 엄마가 계셔도 서로가 방해받지 않고 쉴 공간이 있어 다행이었다.
엄마는 해외에 있는 나의 집에 방문할 때마다 계절에 상관없이 산타할머니가 된다. 내 아이에게는 요즘 제일 좋아하는 토끼관련 장난감, 옷가지들을, 나와 남편에게는 발리에서 구하기 힘든 한국 식재료나 주방용품, 한국 화장품 등을 잔뜩 들고 와주시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어떤 물품을 보내도 통관이 자유롭고 배송비가 적당한 싱가폴에 비해 인도네시아 발리는 통관이 쉽지 않아 한국 물품을 받기가 어려워 항상 인편을 통해야하는 단점이 있는데 그래서였는지 엄마의 방문이 이 곳에서는 유달리 더 반가웠다. (심지어 두 달전 한국에서 그렇게 건어물과 다이소용품들을 쓸어왔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사위가 좋아하는 만두를 해주시겠다며 정성껏 만두속을 만들어 꽝꽝 얼려놓았는데 출국 당일 분주한 마음에 냉동고에서 꺼내는걸 깜빡하고 오셨다며 얼마나 아쉬워하시던지. 결국 엄마는 현지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로 만두속을 다시 만들어 사위에게 만두를 먹이셨다. 그 외에도 더덕무침, 열무김치 등 이 곳에서는 찾기 힘든 식재료로 만든 엄마표 반찬들이 줄줄이 지퍼백과 랩에 꽁꽁 싸여 캐리어에서 계속 나왔다.
특히 더덕무침은 내가 성인이 되고나서야 그 맛을 알고 좋아하기 시작한 반찬이었는데 20대 여기저기 떠돌다보니 막상 엄마와 같이 살면서 엄마표 더덕무침을 얻어먹은 기억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꼭 먹고 싶은 반찬은 아니었는데 엄마가 출국 전 장을 보다가 더덕이 너무 좋아 손수 다 손질하셔서 만들어오신 것이다. 이 곳에서는 쉽게 구할 수 있는 식재료가 아니니 아껴먹어야겠다는 생각에 냉장고 구석에 꼭꼭 넣어놓고 두어 번 남짓 꺼내먹었을까. 엄마가 한국으로 돌아가신 후 냉장고에서 꺼낸 더덕무침은 이미 쉬어있었다. 반도 먹지 못한 더덕무침이 그대로인 반찬통을 보고있는데 이상하게 눈물이 핑 돌았다. 엄마는 나조차도 내가 좋아하는지잊고 있던 반찬을 여전히 기억하고 공을 들여 만들어 가져다 주셨는데 아껴먹겠다는 생각에 막상 그 맛을 즐기지도 못하고 다 내버리게 된 모양이 꼭 엄마의 내리 사랑을 영원히 받을 수 있을꺼라 생각하는 내 어리석음과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머리칼이 얇고 가는 우리 엄마는 덥고 습한 열대나라만 골라 사는 나 때문에 올 때마다 파마머리를
포기하고 오신다. 아무리 드라이를 해도 집 밖만 나서면 볼륨이 폭삭 주저앉아 꼭 비맞은 모양새가 되기 때문이다.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나와 내동생에게 엄마의 머리를 가지고 장난친다거나 만진다는건 금기에 가까웠는데 신기하게도 엄마는 손녀딸의 짓꿎은 장난에는 전혀 화를 내지 않으신다. 할머니 머리 함부러 만지지 말라는 내 외침이 무색하게 나윤이는 할머니 머리를 마구 헝클어놓는데도 엄마는
하하하 하고 웃기만 하신다. 머리가 망가져도 웃는 엄마라니. 평생 못 본 엄마의 모습이었다.
발리는 매니큐어나 페디큐어가 싼 편이니 여기 오면 나랑 같이 가보자고 지나가며 한 내 이야기가 엄마에게는 꽤나 기억에 남으셨었는지 평생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네일샵을 가자고 하셨다. 노동력이 싼 인도네시아에서는 한국보다 싼 가격에 네일샵을 갈 수 있어서 발리에 온 이후 시어머니를 따라 몇 번 가본 나는 이제 제법 네일샵이 익숙해졌다. 이 곳에도 삐까뻔쩍한 네일샵은 많지만 내가 다니는 곳은 무척 허름한 방 한 칸에서 하는 저렴한 네일샵이다. 한국 분들이 인터넷에서 괜찮다고 해서 처음 가봤다가 나쁘지 않아 시어머니도 모시고 가던 곳이었다. 네일샵이 처음이었던 엄마는 발톱과 손톱을 손질받는 동안 30분이 넘게 네일팁 샘플들을 들여다보며 색을 정하지 못하고 안절부절하셨다. 일찍이 이번엔 연보라색으로 해야겠다 정하고 간 나는 그런 엄마를 보며 직원들 손질 끝나기 전에 얼른 색깔을 정해야한다며 핀잔을 주었다. 나의 핀잔에 무안해하시면서도
엄마는 아직도 진분홍색과 펄이 들어간 분홍색 중 무슨 색이 낫냐며 내 의견을 물어오셨다. 족히 30색깔은 될 몇 뭉치의 네일 팁 묶음을 들고 이 색 저 색을 번갈아보며 손톱에 대어보는 엄마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불현듯 내가 처음으로 매니큐어를 받을 때가 떠올랐다.
평생 처음 가보는 네일 샵에서 누군가가 내 손톱을 알뜰하게 다듬어주고 있고 나는 황송하게 앉아 그 손톱에 칠할 색을 찾기만 하면 되는데 왜 이렇게 비슷한 색이 많은지. 해보고 싶은 색을 골랐다가 안 어울리면 어쩌지. 맨날 집에서 혼자 발라보던 안전한 색깔로 정하면 뭔가 네일샵에서 특별하게 바른 느낌이 나질 않을 것 같은데. 이 다음 언제 내가 또 네일샵에서 손발을 다 뻗치고 이걸 발라보겠어. 다음은 없으니 안전한 색깔로 정하자.
내가 처음 22살 베트남 어느 시골 네일 샵에 가서 느꼈던 이 고민들을 60이 넘은 엄마는 이제야 해본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처음하는 경험이 점점 드물어지기 마련이라는데 그런 면에서 엄마의 발리행은 여러가지로 처음이 많았던 3주였다. 처음 네일샵에서 네일과 페디를 받았고, 비치클럽에서 셀룰라이트가 다 보여도 비키니나 수영복 입는 것에 거리낌이 없는 호주 아주머니들을 처음 보았고 또 그들에게 용기를 얻어 다음엔 수영복을 가지고 오시겠다 다짐도 하셨다. 처음으로 3주간 거의 손에 물한방울 안 묻히고 사위와 딸이 한 음식을 맘껏 즐기셨고 처음으로 발리 음식들 바비굴링, 사떼바비 등등을 드셨다. 처음으로 혼자서 호텔 방 하나를 다 쓰며 우리와 호캉스를 즐기셨다.
내가 엄마가 되어 내 아이의 첫 눈짓, 첫 걸음마, 첫 말 한마디를 내 눈으로 보고 내 귀로 들으며 느끼던 감정은 가슴 벅찬 즐거움이었다.
엄마가 계시는 3주간 나의 엄마에게 수많은 처음을 선사하며 어린 아이같이 좋아하고 신기해하는 엄마의 모습을 바라보았을 때의 그 감정은 정의할 수 없는 가슴뭉클함이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