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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리안러버 Apr 28. 2024

만날 때마다 이민가방을 지고 오는 여자

방콕에 도착했을 때 곧바로 찾아간 곳은 다름 아닌 공항 짐 보관소였다. 생각해보면 나는 그를 만날 때마다 이민가방을 끌고 있었다.


인도네시아 6개월 봉사를 끝내고 싱가폴에 들려 한국에 귀국할 때 그는 싱가폴 공항에 나를 마중나오며 나의 이민가방과 처음으로 만났다.


두번째는 방콕. 나보다 하루 일찍 방콕에 도착해있던 그는 공항에 나를 마중나와 영국으로 가는 1년치 유학짐이 들어있는 내 이민가방을 익숙한듯 넘겨받아 함께 공항 짐보관소로 향했다. 아마 영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올 때도 역시나 나는 이민가방을 질질 끌고 싱가폴에서 그와 조우했었다.


방콕에서 만난게 13년 8월이었고 마지막으로 만난게 12년 7월이었으니 1년이 지나 성사된 만남이었다. 지난 1년간 나는 대학을 졸업했고 그는 인도네시아 여행을 끝마치고 싱가폴로 돌아와있었다. 서로에게 마음이 있어 연락은 주고받았지만 사귄다고 하기엔 애매한 사이. 알고보니 나는 이미 우리가 사귀고 있었다고 생각했던 반면 그는 방콕에서 다시 만난 이후로 우리의 관계를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다고 했다. 결국 나는 대학 졸업하고 대학원 준비하고 인턴생활하며 아르바이트까지 하는 1년동안 연애도 삽질하며 혼자 했다는 소리…  이 때 생각만 하면 지금도 자다가도 옆에서 자는 남편 뺨을 찰싹 때리고 싶을 정도로 약이 오른다.


1년 만에 만나서인지 우린 숙소에 오는 내내 무척 어색했다. 치앙마이로 가기 위한 밤기차를 예매했는데 각자 1층, 2층 침대에 자리를 잡고 별 대화도 하지 않았다. 2층 침대에 누워 오지 않는 잠을 청하며 내가 태국에 온 게 잘한 결정인가. 유학 짐까지 싸들고 태국에 와서 이 사람을 1년만에 만나서 얻고자 하는 결론이 무엇인가 나조차도 의아해질 무렵 동이 텄고 나는 한 잠도 자지 못한 채 치앙마이에 도착했다. 예약한 숙소에 도착해 짐을 풀고 뒤늦은 아침식사를

위해 거리를 걷기 시작하며 어색하게 얼어있던 분위기는 서서히 풀렸다.


어두침침한 로컬 마사지샵 뒷방에 들어가 거의 레슬링을 방불케 하는 태국마사지를 받기도 했고 아기자기한 프랑스식당에 가서 저렴하지만 근사한 저녁식사도 했다. 이 때 당시 비건을 지향하는 채식주의자였던 그와 식사하기 위해 나는 나름 많은 맛집을 포기해야했다. 다행히 매운 음식이라는 공통분모가 있는데다 그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더해져 평소에 샐러드라면 질색팔색을 하던 나는 태국 여행 내내 대차게 두부와 풀만 씹어댔다.


어느덧 태국에서의 여행이 끝나가고 헤어지기 하루 전부터 울음 바다가 시작되었다. 서로에 대해 어느 정도 확신이 생겼지만 이렇게 헤어지고 나면 우리가 언제 다시 볼 수 있을 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 나는 영국에서 학생 신분으로 1년을 보내야했고 그는 싱가폴에서 새로운 일을 찾아야했다. 너무 멀리 떨어져있는 서로의 삶으로 돌아간 후에 어떤 일이 생길지, 연락만 주고받다 지쳐 뜸해지는 연락 끝에 헤어지고나면 결국 서로의 얼굴을 보는건 지금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이 두려움은 우리의 5년 롱디연애 내내 나의 가장 큰 두려움이었다. 얼굴을 보지못한 채 제대로 된 마무리없이 각자가 살고 있는 시공간에서 각자가 헤어지는 것.


그렇게 한바탕 방콕공항이 떠나가라 울고 퉁퉁 부은

얼굴로 나는 이민가방을 이고지고 영국으로 향했고 그는 싱가폴로 돌아갔다. 그렇게 우리는 여태껏 그래왔듯이 언제 또보자는 기약없이 각자가 있어야할 자리로 발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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