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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리안러버 Oct 05. 2023

족자카르타, 싱가폴 받고 방콕?

족자카르타에서의 시간을 뒤로하고 아체로 돌아와 나는 고아원 아이들과 함께 하는 일상으로 돌아갔다. 오전에는 그 지역에 남아있는 구호단체 NGO에 대해 조사하거나 방문하고 혹은 저녁 때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한 수업준비를 했다. 내가 살던 곳은 예전 동남아 쓰나미가 지나간 이후 현지인 아이들을 위해 외국 NGO와 인도네시아 NGO가 함께 지은 고아원 건물이었는데 시멘트로 지은데다 에어컨은 커녕 선풍기도 내가 사는 숙소에만 특별히 있을 정도여서 볕이 내리쬐는 한낮이면 숙소 안보다 밖이 훨씬 시원할 지경이었다. 그런 날이면 한밤까지도 낮동안 벽에 흡수되었던 열기가 뿜어져나와 숨이 턱턱 막혀 잠을 자기 힘들 때도 많았다. 그럴 때면 그와의 족자카르타 여행을 곱씹거나 사진을 보며 즐거웠던 기억을 떠올리며 잠을 청하기도 했다. 


자카르타 형님 댁에서 잠시 쉬었던 그는 다시 여행길에 올라 오토바이로 자바섬을 여행하고 있었다. 때로는 인터넷 신호가 약해 메세지가 잘 전해지지 않거나 오토바이 운전 중이기 때문에 답이 아주 늦게 도착하기도 했지만 그와 여전히 연락이 닿는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다만 이 사람을 언제 또 만날 수 있을지는 여전히 미지수였다.


아체에서의 6개월 봉사활동의 마무리가 지어질 무렵, 한국행 비행기 티켓을 끊기 위해 티켓 사이트를 살피는 도중 그가 싱가폴에 볼 일이 있어 잠시 들어갈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그럼 나 한국 가기 전에 싱가폴 들러서 너 보고 가도 돼?" 하고 장난스럽게 물었고 

그는 "물론이지, 대환영이야!" 라고 답했다. 그렇게 나는 6개월간 아체에서 살던 짐을 꾸려 아체에서 쿠알라룸푸르로, 쿠알라룸푸르에서 싱가폴로 향했다. 저가항공을 이용했기 때문에 짐을 부치고 찾는 것도, 터미널을 옮기는 것도 여러가지로 고단했지만 그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들떠 무거운 이민가방도 무겁게 느껴지지 않았다. 


싱가폴행 티켓을 구매한 후 싱가폴에서 일주일을 지내는 동안 어디에서 지내야하나 고민하며 숙소를 찾아보고 있었는데 아차차, 살인적인 싱가폴의 물가를 몰랐던 순진하고 어리디 어린 나. 그가 싱가폴에 산다는 것만 알고 있었지 정확하게 싱가폴이 어떤 나라인지, 얼마나 물가가 비싼 곳인지는 미처 몰랐었다. 가장 싼 호스텔 도미토리룸을 찾아봐도 내가 생각했던 하루 숙소 예산을 뛰어넘는 가격에 1차 당황. 저렴한 호스텔들이 대부분 오래된 건물에 있어 엘리베이터 없이 계단을 이용해 올라가야하는 데에서 2차 당황. 결국 염치 불구하고 나를 좀 집에서 재워줄 수 있냐고 그에게 물을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원래 자기 집에서 묵는거 아니었냐며 흔쾌히 괜찮다고 하였다. 집에 하우스메이트들이 있긴 하지만 자기 방이 넓으니 걱정말라고 했는데 내 걱정은 방이 좁냐 넓으냐가 아니라 이 사람의 방에 내 발로 들어가는 것이 옳으냐 아니냐에 더 가까웠다. 하우스메이트들이 있다고 하니 무슨 일이 생기면 도움을 청할 수는 있겠지. 족자카르타에서 함께 여행 다닐 때도 아무 일 없었으니 이번에도 아무 일 없겠지. 스스로가 믿고 싶은 생각만 하며 싱가포르 공항에 도착했다. 평소 친구들 사이에서도 비관주의자로 유명한 내가 이럴 때면 초낙관주의자로 변했다.


6개월간 인도네시아 외진 도시에서도 더 들어간 시골에서 살다가 갑자기 싱가포르에 도착하니 문명으로 다시 돌아온 듯한 느낌이었다. 서울과 비슷하지만 무척 후덥지근했고 훨씬 깨끗했고 실내는 겨울 저리가라할만큼 추웠다. 반가운 얼굴로 그와 인사를 하고 그의 집으로 향했는데 도착해보니 어렸을 때 자주 가던 외할머니 할아버지가 사시던 빌라같은 오래된 빌라 건물에 방이 4개인 집을 빌려 방 하나를 본인이 사용하고 나머지 3개의 방은 다른 사람들에게 세를 주고 부엌과 거실을 함께 사용한다고 했다. 처음 들어간 그의 방은 낡아보였지만 기분 좋은 향내가 났다. 마스터룸(우리나라로 치면 안방, 보통 욕실이 안에 함께 있는 방)이었지만 그 방 자체가 이미 단독 스튜디오 집이라고 해도 될만큼 사이즈가 크고 다른 방들과 떨어져있었다. 이렇게 방이 뚝 떨어져있으면 나중에 무슨 일이 생겨도 하우스메이트들의 도움을 받기가 쉽지 않겠다는 뒤늦은 걱정에 긴장감이 몰려왔다. 


그는 나를 데리고 싱가포르의 명소란 명소를 열심히 데리고 다녀주었고 처음 보는 싱가포르 야경, 멋스러운 조경으로 가득한 공원, 예쁘고 깨끗한 거리, 바쁘고 멋있어보이는 사람들로 가득한 도심... 싱가포르는 둘러볼수록 매력적인 곳이었고 신기해하는 나의 모습에 그 또한 신이 나서 싱가포르의 이모저모에 대해 설명해주기 바빴다. 여기저기 붙어있던 벌금부과 표지판, 지하철에서는 물 이외 일체 음식과 음료를 먹을 수 없다는 규칙, 우리나라 에스컬레이터의 두배는 빠른 에스컬레이터 등등... 그 때는 알지 못했다. 내가 이 곳에 수없이 드나들게 될 것이란 것. 그의 낡은 빌라 방 한켠이 나의 신혼집이 될 것이란 것을. 


싱가포르에서의 일주일이 끝나가고 다시 한국으로 향해야하는 날이 다가오자 우리는 내가 떠나기 전 마지막 날을 기념하는 한 잔을 위해 어느 바로 향했는데 자꾸만 핸드폰이 울리고 이메일 여러 통이 왔다는 알람이 울렸다. 알딸딸 기분 좋게 취했던 나는 "Check-in Information" 이라는 이메일 제목을 보고도 도통 감을 잡지 못했고, 중얼거리던 나를 보다못한 그가 내 폰을 뺏어 메일을 읽어보더니 말했다. 

"너 오늘 출국이라고 되어있는데? 지금 공항에 가있어야하는 시간이라고!!! 내일 출국이라며?"

아차차 한 번 한 실수 다시 안할 리 없다더니... 2년 전 페루에서 미국으로 돌아갈 때 새벽비행기 날짜를 잘못 보고 그 다음 날 공항에 가서 뻔뻔하게 그 전날 티켓을 내밀던 나는 2년 후 싱가폴에서 또 똑같은 실수를 한 것이다. 다른 점은... 다음 날 공항에 가기 전 그래도 그 전 날 알았다는 것. 같은 점은... 티켓 환불이나 변경따위는 없는 저가항공이기에 똑같은 표를 새로 끊어야한다는 것이었다. 그 때부터 술이 확 깨면서 다음 날이라도 들어갈 수 있는 티켓을 사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비행기표를 찾았다.


숙소비 아끼자고 남의 집에 얹혀잤지만 결국 비행기 티켓비를 홀랑 날리고 다시 사야하게 되었으니 내 자신이 우습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다시 그 다음 날 티켓을 구매해 한국으로 무사히 돌아왔지만 우리 사이엔 아무런 진척이 없었다. 서로 수시로 연락을 주고받았지만 서로를 여자친구, 남자친구로 부르기엔 무엇인가 부족했다. 그렇게 한국에 돌아와 나는 마지막 학기를 과외알바, NGO 파트타임 인턴, 학교 수업 그리고 유학 준비로 꽉꽉 채워보냈고 그는 다시 인도네시아 여행을 시작했다. 섬에서 더 먼 섬으로 배를 타고 계속 이동하며, 일주일동안 신호가 없는 정글에서 트래킹을 하면서도 그는 이따금씩 나에게 연락을 했고 아날로그를 좋아하는 사람답게 각 섬에서 엽서를 보냈다. 그의 연락은 언제나 반가웠지만 미래가 없는 이런 관계는 의미가 없다는 생각에 그와의 연락을 줄이고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보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결국 가장 생각나는건 이 사람이었지만 진지한 관계를 생각할 수 없는 사람에게 무엇을 기대할 순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싱가포르에서의 만남 이후 1년이 넘게 서로를 만나지 않았다. 나를 좋아하고 연락을 계속하고 싶다면서도 때를 기다려보자는 애매한 말만 하는 그에게 점점 마음이 식어갈 무렵 나는 준비하던 영국 대학원 과정에 합격하게 되었고 영국으로의 출국을 앞두고 있었다. 


내가 영국에 간다는 말에 그는 영국에 가기 전 동남아 어디든 한 곳에 들려 자기를 만나고 갈 수 있겠냐고 물었고 바보같은 나는 유학 짐을 이고지고 (feat.이민가방) 그를 만나기 위해 태국 방콕 공항에 도착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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