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확신을 주면 너에게 확신을 줄게

롱디의 숙명 - 내가 갈까, 너가 올래

by 두리안러버

우리가 서로 알아가기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그가 내가 있는 곳으로 온게 바로 영국이었다.

5년간의 롱디기간동안 우리는 서로가 있는 나라로, 아니면 제 3국으로 서로를 만나기 위해 지겹게도 많이 비행기를 탔다. 다른 연인들이라면 일주일에 한 번씩 하는 영화 한 편, 밥 한 끼 같이하는 소소한 데이트를 위해 우리는 번 돈을 부지런히 모으고 휴가를 맞춰가며 시간을 비우고 지갑을 채웠다.


초기에는 누가 누구를 만나기 위해 어디로 가느냐에 대해 날을 세우고 셈을 했던 적도 있었다.


족자카르타에서 함께 여행한 이후 그를 보기 위해 싱가폴로 갔던 것도 나였고, 영국으로 유학을 떠날 때 굳이 거치지 않아도 될 방콕을 거쳐 그를 보러간 것도 나였다. (물론 그도 싱가폴에서 방콕까지 이동했었지만 싱가폴에서 방콕은 엎어지면 코닿을 거리였기 때문에 내가 굳이 영국을 가기 전 유학짐을 이고지고 방콕을 들린 수고가 더 컸다.) 그보다 7살이 어린 나였지만 그와의 관계에 있어서 주도적으로 만남을 이끌어나간건 결국 (여자인) 나였다.


그와의 관계에 대한 고민을 친구들에게 털어놓을 때면 "그래서 그 사람은 한국에 너 보러 안 온대?" 라고 묻곤 했는데 마음에 항상 있던 그 묵은 질문이 친구들의 입을 통해 나올 때면 나는 한없이 참담해졌다. 나에 대한 그의 마음이 한국으로 나를 보러올만큼 크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그와 아무렇지 않게 연락을 주고받다가도 주위 사람들에게 이 물음을 들은 날이면 나는 잊고 있던 그에 대한 원망과 관계에 대한 회의감, 무너진 자존심에 불쑥 그와의 연락을 끊어버리기를 여러 번 이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서로 더 알아가보자, 만날 기회를 만들어보자는 말로 나를 다독였는데 이 관계를 지탱하고 있는건 서로에 대한 호감 그 이상 이하도 아닌 그저 그에 대한 나의 져버리지 못한 미련이라는 생각마저 들곤 했다. 자신의 확신을 위해 상대가 먼저 확신해주기를 바라는 서로 지기싫어하는 대치상황이었다. 아니 서로 먼저 상처받기 싫어하는 대치상황이었다. 마음은 있지만 먼저 선뜻 다가오지 않는, 손에 잡히지 않는 사람을 쫓아 시간 낭비하고 있다고 느껴질 무렵 영국에 있는 나를 보러 날아온 그를 보니 그제야 이 사람도 이 관계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요리가 취미였던 그는 보잘 것 없던 우리 숙소 주방에서 영국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식재료로 근사한 생일 식사를 차려주기도 했고 세상 무미건조한 내가 평소 쉽게 지나쳤던 일상적인 풍경, 음식, 동네 이모저모를 새로운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주었다. 그가 오기 전 흑백일색이었던 나의 영국생활이 그가 영국에 다니러 온 후 색을 입은듯 생동감이 넘치는 느낌이었다. 얇은 지갑사정에 가장 싼 요거트, 가공제품들만 사서 간단하게 음식을 조리해먹던 나를 슈퍼마켓으로 데리고 가서 처음으로 질좋은 채소와 고기, 향신료를 골라 직접 요리를 해주었고 집 앞 버스정류장을 그렇게 드나들며 한번도 쳐다보지 않았던 이웃집 담장의 흐드러질듯한 수국에 처음으로 눈을 주게 해주었다. 턱없이 비싼 런던 숙소비에 런던에 숙소를 잡지 못한 채 브라이튼에서 아침 기차를 타고 샌드위치 한 끼로 런던을 하루종일 배회하다 밤기차로 브라이튼에 돌아와 막차 버스를 타고 집에 들어온들 몸이 지치지 않았다.


그에게는 누나와 형이 하나씩 있는데 형은 족자카르타 여행을 끝마치고 자카르타에 같이 돌아올 무렵 차를 얻어타며 만난 적이 있었지만 영국인과 결혼해 싱가폴에 살고 있다는 누나는 내가 싱가폴에 갔을 때조차도 만나보지 못했었다. 누나의 시어머니인 센스쟁이 영국할머니 Judy와 무척 친했던 그는 Lake district의 작은 마을에 살고 있는 Judy 집에도 나를 데리고 갔었는데 그 때 Judy는 우리를 배웅하자마자 그의 누나에게 전화를 걸어 "네 막내동생이 드디어 여자친구가 생긴 것 같다" 며 속보를 타진했다고 한다. 그도 그럴것이 그는 싱가폴에 살고 있는 누나와 매우 가까운 사이였지만 단 한번도 누나를 비롯한 가족에게 본인의 여자친구를 언급하거나 소개시켜준 적이 없었다고 했다. 오죽하면 우리 시어머니와 시누이는 그 당시 서른이 넘은 그가 한번도 여자친구나 결혼에 대해 입에 담지 않으니 아예 여자에 관심이 없다고 단정지을 정도였다고 한다. Judy의 발빠른 속보로 말 많고 탈 많은 우리 시누이는 나의 존재를 알게되었고 영국 생활이 끝나고 한국에 들어가기 전 그를 보러 싱가폴을 거쳐갈 무렵 나는 그의 부모님, 시누이와 정식으로 마주하게 되었다.


영국에서 꿈같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헤어짐은 다시 찾아왔지만 그 전만큼 불안하지는 않았다. 나에게는 이 사람인 것 같다는 어렴풋한 확신이 생겼고 영국에서 돌아가기 전 싱가포르에서 다시 만날 날이 정해져있다는게 그 이유였다. 그럼에도 그가 떠나고 시작될 논문 작성과 고달픈 구직의 시간을 생각하니 절로 눈물이 났다.


그는 내가 동남아시아나 싱가폴로 구직해볼 것을 적극적으로 바랐지만 막상 결혼을 약속한 사람도 아닌 그만 보고 동남아시아나 싱가폴로 훌쩍 내 모든 인생의 방향을 바꿔야한다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가슴 깊이에는 "왜 또 내가? 왜 항상 내가?" 라는 의문도 있었다. 결국 졸업 후 일단은 한국에 돌아가는 방향으로 결정한 후 정해진 진로가 없는 착잡한 마음으로 귀국 전 그를 만나기 위해 싱가폴 행 비행기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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