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서 1년간 유학생활을 마치고 정해진 미래가 없이 한국으로 돌아가면서도 싱가포르에 들려 다시 그를 만날 생각을 하니 나는 철도 없이 설렜다.
2년 전 인도네시아 봉사활동을 끝내고 싱가포르에 있는 그를 만나러 갈 때와의 설렘과는 조금 달랐다. 그때는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싱가포르이라는 여행지에 대한 설렘과 여행지에서 만나 호감을 갖게 된 사람과 재회할 수 있다는 기대 정도가 전부였지만 이번 싱가포르행은 뭔가 태국, 영국에서의 재회 이후 다시 방문하는 것이라 정말 남자친구를 만나러 간다는 기분이 새삼 느껴졌다.
장거리 연애를 지속하며 싱가포르 공항을 들락거릴 때마다 픽업하는 그를 만나기 전 꼭 하던 의식이 있었는데 세면도구와 화장품을 꼭 기내에 들고 탔다가 공항에 도착해 수하물이 나오길 기다리는 동안 화장실에 가서 긴 비행시간 동안 기름이 잔뜩 올라온 얼굴을 씻고 양치질까지 야무지게 한 다음 소개팅 나가기 직전 꽃단장하듯 뽀송뽀송하게 화장을 하고 수하물을 찾은 뒤 도착 구역에서 기다리고 있는 그를 만나는 것이었다. 영상통화로 매일같이 잠옷바람에 자고 일어난 혹은 자기 전 생얼만 보여주다가도 오랜만에 실제로 만나는 연인에게 여전히 잘 보이고 싶은 마음. 아마 롱디 해본 분들은 다 알듯하다.
나름 두 번째 방문이라고 싱가포르 공항에서 그의 집으로 향하는 길과 동네가 덜 낯설게 느껴졌다. 나름 두 번째 방문임에도 나는 첫 번째와 별반 다르지 않게 여전히 이민가방과 큰 캐리어를 질질 끌고 낯선 듯 익숙한 그의 집에 발을 디뎠다. 싱가포르 관광은 지난번 충분히 한 것 같아 이번엔 소소하게 데이트를
하며 시간을 보내자 생각하며 짐 정리를 하고 있는 나에게 갑자기 그가 쭈뼛거리며 말을 건넸다.
”내일 우리 누나 같이 보러 갈래? 너 한 번 만나고 싶대. 엄청 귀여운 우리 조카도 보여줄게! “
영국인 남편과 결혼해 싱가포르에 살고 있다는 그의 누나. 그는 평소 통화할 때면 종종 누나가 저녁에 외출해야 해서 조카를 봐주러 가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이미 그가 자주 공유하던 조카사진으로 나는 아기잡지 표지모델과 여러 지면광고모델을 할 정도로 귀여운 외모를 가진 그의 조카를 잘 알고 있었다. 가족에게 나를 소개한다니 그가 이 관계를 이전보다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 기뻤던 것도 잠시…
영국에서 지내는 동안 한 번도 자르거나 다듬지 않아 지나치게 길어 촌스러운 기장의 머리에 가져온 이민 가방엔 뭘 싸들고 왔는지 당최 제대로 갖춰 입을 옷 한 벌이 없었다. 몰래 인스타로 염탐한 그의 누나는 본인을 꽤나 잘 꾸미는 사람이었다. 보통 본인을 잘 꾸밀 줄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꾸밈에도 민감한 법. 당장 내일 그의 누나를 만나러 가야 한다니 부랴부랴 그의 손을 붙잡고 가까운 쇼핑몰로 향했다.
H&M에서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빨간색 원피스를 급한 대로 하나 장만하고 같이 신을 만한 8cm 하이힐을 찰스 앤 키스에서 한번 신어보곤 물개박수를 치며 칭찬하는 그의 성원에 덜컥 구매했다. 그리고 이 하이힐은 이후 나에게 여러 번 굴욕을 안겨주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힐이 한창 유행이던 대학생 때도 긴 통학거리로 인해 5cm 이상 높은 힐을 몇 번 신어보지도 못했을뿐더러 무엇이든 편한 게 최고다라는 주의라 그나마도 새내기 때 이후로는 컨버스화밖에 신어본 적이 없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몇 년 만에 8cm 힐을 신으려니 당연히 탈이 날 수밖에 없는 일 아닌가.
다음 날 대충 구색을 맞추고 누나를 만나러 가는 길. 택시를 타고 누나네 집주소를 부를 줄 알았던 그의 입에서 뜻밖의 이름이 나왔다.
“샹그릴라 호텔 센토사로 가주세요 “
그리고 그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누나가 지금 센토사에서 조카 데리고 호캉스 중인데 거기서 저녁 먹자고 해서 거기로 가는 거야. 가면 우리 어머니 아버지도 같이 계실 거야. “
우리 어머니 아버지? 내가 잘못 들었나? 갑자기 누나 보러 간다더니 거기에 부모님까지? 그리고 왜 그 얘기를 지금에서야 하는 거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