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사랑을 꿈꾸는 두 남녀 이야기
카페, 마지막 날
털썩. 선향이 동그란 나무 의자 끝에 걸터앉았다. 오른 무릎을 톡톡 두드렸다. 가방에서 손때 묻은 플라스틱 약통을 꺼냈다. 진통제를 두 알 꺼내 입에 털어 넣었다.
'후우.'
한 숨을 내쉬었다. 이마에 식은땀이 주르륵 흐르니 몸까지 부르르 떨렸다. '매니저 백선향' 곱게 낡은 명찰을 조심스럽게 떼어냈다. 오늘따라 강화유리문이 무겁게 열렸다.
거리에 나오니 회색 하늘은 금방이라도 주저 앉을 듯 옥상 끝에서 바들바들 떨면서 버티고 있었다. 위태로운 하늘을 올려다본 사람들마다 걸음이 바빠졌다. 여유로운 선향의 발걸음과 대조됐다. 비 오기 직전의 스산함이 사방에 깔렸다. 미간을 찌푸리며 편의점 처마 아래에서 알바생이 담배를 피웠다. 선향이 문을 열려고 하자 원망하듯 바라봤다.
'뻐끔뻐끔뻐끔.' 빠르게 세 번. 쭉쭉쭉 빨아들이고 장초를 모서리에 올려둔다. 담배의 위상이 안타까울 정도로 위태롭다. 센 바람이 몇 번 불었다. 뒹구르르. 힘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좁쌀만 한 불씨가 바닥에서 꺼지지 않고 실 같은 연기를 간신히 세상에 내보냈다. 때마침 비까지 온다. 장초는 버틸 힘이 없었는지 불씨가 사그라졌다. 어둑어둑해지니 편의점 간판에 불이 번쩍 들어왔다.
선향은 따뜻한 생강 벌꿀차를 사서 한 모금 마셨다. 오들오들 떨리는 게 멈췄다. 우산을 꺼내 썼다. 땅바닥에서 비릿한 내음이 올라왔다. 아스팔트 바닥은 오일을 두른 듯 매끄러워 보였다. 두둑두둑거리는 빗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좋아 선향은 느릿느릿 걸었다. 거리의 거의 모든 사람들은 선향을 앞질러 갔다.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이지만 지고 싶지 않다는 오기가 발동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30분 전에 진통제를 먹은 게 기억났다. 선향은 걷는 속도를 줄였다. 그리고 되도록 천천히 걸었다.
"이제는 조금 느리게 살고 싶어."
누구도 듣지 못할 만큼 작은 목소리로 선향이 말했다.
서점
커피숍과 같은 블록 위, 모퉁이 지하에 서점이 있다. 카페 근처에 줄곧 서점이 있었지만 1년 넘도록 들러 볼 여유가 없었다.
서점에 비를 피하려고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선향의 우산을 부러운 눈으로 보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 우산을 탁탁 털고 가지런히 접어 비닐로 감쌌다.
입구에 몰린 사람에 비해 서점 안에는 사람이 적었다. 사람 수에 비해서 실내가 무척 조용하다고 생각했다. 선향에게는 매우 인상적인 광경이었다. 카페는 보통 두 테이블만 손님이 앉아 있어도 떠들썩한데, 서점은 카페와 많이 다르다고 생각했다. 아늑한 분위기는 비슷하다 생각 했다.
수천 권의 책들이 가지런히 꽂혀 있는 책 숲 길을 따라 걸었다. 서점 내부는 꽤 넓었다. 어딜 가나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한 곳도 시끄럽지 않았다. 더 안 쪽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손님들이 앉아 책을 읽을 수 있게 놓아둔 6인용 책상이 있었다. 선향도 서너 권의 책을 뽑아 책상에 두고 읽었다. 후르륵거리며 책장을 넘겼다.
한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깊이 사랑은 깊은 그리움과 함께 다닌다.'
꿈
송헌은 퇴근하며 선향에게 몇 번 전화했다. 그러나 통화 연결이 되지 않았다. 걱정되어 한 걸음에 서점으로 왔다. 서점 어디쯤에 선향이 있을까 서가와 서가 사이를 둘러보며 걸었다. 한 칸. 두 칸. 세 칸쯤 지날 때, 익숙한 향을 맡았다. 복숭아 향과 아이보리 비누향이 섞인 듯한 향.
선향이 근처에 있었다. 서점의 가장 깊은 곳에 발길이 머물렀다. 넓은 나무 책상에 앉아 책에 푹 빠져있는 선향이 보였다. 송헌은 뒤로 가서 선향을 놀라게 하여 줄까 하다가 그냥 손을 흔들어 인사 했다.
"무슨 책 읽어요?"
"아차차. 지금 몇 시죠?"
"하하. 놀란 토끼 같아요. 6시 30분 이요."
"미안해요. 많이 걱정했죠. 시간 가는 줄 몰랐어요."
"괜찮아요. 별일 없었죠? 그런데 무슨 책이에요?"
"사진과 그에 어울리는 짧은 글을 지어 넣은 책이에요."
"어디 한 번 봐봐요"
"네, 여기요. 제주도 오름 사진이에요."
"엊그제 당일로 제주도 다녀와서 좀 아쉬웠죠?"
"네 좀 아쉬웠어요."
"우리 조만간에 다시 가요." 책을 들여다보며 송헌이 말했다.
"네, 좋아요. 제주도를 다룬 책을 찾다가 이 책을 찾았어요."
"아, 그런데 오름? 오름이 뭐예요?"
"저도 잘 몰라요. 이 사진 보세요. 이게 오름이예요"
오름은 야트막한 언덕처럼 보였다. 여인의 선처럼 아름다웠다. 시인이 사진에 글을 달았다. 역량 껏 오름을 예찬하기도 하고, 때로는 담담하게 오름을 말했다. 오름은 들판같이 생겼지만 들판은 아니었고, 산처럼 생겼지만 산은 아니었다.
"저는 사진을 좋아해요." 선향이 말했다.
"네, 알고 있어요." 송헌이 대답했다.
"네? 어떻게 알았어요?"
"선향 씨 집에서 짐 챙겨오던 날 기억나요?"
"네 기억나죠. 우리 처음 만난 날"
"그때 선향 씨가 유일하게 들고 나온 게 있었어요. 그게 뭔지 기억나요?"
"아... 뭐였죠? 기억이 날듯 말듯"
"앨범을 들고 왔었어요. 앨범들이요."
"기억나요"
"네, 선향 씨가 사진을 찍거나, 찍히는 것을 굉장히 좋아한다고 짐작했어요."
"맞아요. 그런데 저는 사진 자체를 좋아해요. '순간을 영원히...!'" 선향이 광고에 나오는 성우를 흉내 내듯 말했다.
"그런데, '작품'들은 언제 보여줄 거예요?" 송헌은 '작품'에 힘을 줘 말했다.
"하하. 작품이라뇨. 그 정도는 아녜요."
"궁금한 게 있는데요. 사진 찍는 걸 좋아해요? 아니면 찍히는 걸?" 송헌이 말했다.
"찍는 것 만큼이나 누가 저를 찍어주는 것도 좋아해요. 이젠 송헌 씨가 저를 찍어줘요."
"좋아요. 사진은 잘 몰라요. 가르쳐주세요. 열심히 배울게요."
"이론은 기본만 알면 돼요. 사진은 마음으로 찍는 거랍니다."
"네!
참고로 저는 글쓰기를 좋아해요."
"에이. 제가 맞추려고 했는데, 먼저 말하기가 어딨어요."
"하하. 미안. 제가 이미 여러 번 말해서 알고 있을 거라 짐작했어요."
"하하. 네, 알고 있었어요. 글쓰기와 사진 찍기라니... 우리 꽤 잘 어울리는 조합이에요."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우리 힘을 합하면 뭘 할 수 있을까요."
"음... 블로그도 있고, 이런 책도 쓸 수 있고, 같이 생각해봐요."
"네! 기대돼요."
선물
선향은 서점에서 잠시 기다리라고 말하고 옆 건물에 있는 애플스토어로 향했다. 맥북을 사고 한 달음에 서점으로 돌아왔다.
송헌은 그 자리에 있었다. 살금살금 다가갔다. 송헌은 조그만 아이폰에 또 뭔가 열심히 적고 있었다. 열중하고 있는 송헌을 보니 선향의 가슴이 두근두근거렸다.
"짜잔" 선향은 송헌에게 하얗고 커다란 박스를 내밀었다.
"아니..." 송헌의 눈이 휘둥그레 졌다.
"아니긴요. 이건 제가 드리는 선물이에요"
"퇴직 선물은 제가 줘야 하는데 오히려 제가 받아서 어떡해요. 지금 나가서 사온 거예요?"
"네" 선향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하하. 큰 손이셨군요" 송헌이 말했다.
"네, 사주고 싶었어요. '작가가 쓰는 노트북'이라고 검색해봤는데 온통 이렇게 생긴 것만 나오더라고요."
"고마워요. 정말로..."
"언제 보여줘요. 아직 어떤 글 쓰고 있는지 보지 못했네요.
"다쓰면 가장 먼저 보여줄게요."
"네, 고마워요."
비오는 거리
내리는 비가 무색하게도 거리에는 무지개색 우산 무리들이 거대한 흐름을 이루고 흘러가고 있었다. 도도한 그 흐름을 거스르려 하는 우산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조금 느리게 걷자며 선향은 팔짱 낀 손을 잡아 당겼다. 느리게 느리게. 호흡을 맞췄더니 걸음이 같아졌다.
"이리 가까이 와요. 비 맞아요."
송헌이 선향을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느릿느릿 움직이는 연분홍 우산이 드디어 거대하고 도도한 흐름에서 분리됐다.
천천히. 그러나 대담하게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우리 어디 가요?"
"우린 같은 곳으로 가고 있어요."
(+ 다음주에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