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겨울 (5)

평범한 사랑을 꿈꾸는 두 남녀의 이야기

by 글담

선향은 차 안에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한 날도 한 시도 못 살 것 같았던 지난날들이 이제는 아득한 옛날처럼 느껴졌다.

"이제 아프지 마요." 송헌이 말했다.

선향의 볼에 빛나는 눈물이 자욱을 그렸다.


어느덧 선호 상가에 도착했다. 옥상으로 가는 계단에 달린 센서등이 하나 고장 나 있었다. 육중한 철문을 열었다.

"어... 선향 씨 방에 불이 켜져 있어요" 송헌이 말했다.

"네 불은 항상 켜둬요. 아주 오랫동안 불을 끄지 않았어요." 선향이 말했다.

송헌은 구두를 벗는 선향의 손을 잡아줬다.


"방바닥이 따뜻해요"

"네 심야전기 보일러예요. 밤만 되면 저절로 따뜻해져요. 작년에 1층 철물점 아저씨가 놓아주셨어요"

"이웃 분들이 친절하시네요"

"네 그런데 저만 보면 불쌍하다고 말씀하세요." 선향이 웃으며 말했다.


비가 후두둑 후두둑 내리기 시작했다. 선향은 비를 바라보며 이젠 준비 없이 비를 만나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송헌은 선향의 눈망울에 비친 노란 백열등을 봤다. 선향의 머릿결은 찰랑거리며 빛났다. 송헌은 손등으로 선향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선향은 송헌의 어깨에 기대 앉았다. 서로의 옆구리를 끼고 마당이 보이는 문지방에 걸터앉았다. 더 이상 춥지 않았다. 송헌의 짙은 밤색 코트는 선향의 무릎을 덮고 있었다.


"우리 양치할까요?" 선향이 말했다.

"칫솔을 가져오지 않았어요."

"내꺼로 같이 해요."

"아... 저야 선향 씨 칫솔을 써도 괜찮은데..."

선향이 칫솔을 가져왔다.

"어서 이~ 해요"

"이..."

"가만히 있어요. 내가 닦아줄게요"

'치카치카'

"자 됐어요. 이제 우물우물해요"

"물을 좀 끓일게요" 송헌이 입을 닦으며 말했다.

"왜요?" 선향이 말했다.

"칫솔 소독 좀 하려고요. 살균을... 읍"


선향이 입술로 송헌의 입술을 덮었다. 선향은 민트맛을 느꼈다. 송헌은 깊은 바다에 빠진 것 같았다. 선향의 머릿속에 아득함이 밀려왔다. 선향은 입술을 조금 벌려 송헌의 윗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이제 물 끓이지 않아도 되겠네요." 선향이 입술을 떼며 말했다.


송헌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손바닥까지 불긋불긋해졌다. 달아오른 손바닥을 선향의 무릎 위 수술 자국에 가져다 댔다. 선향은 움찔했다.

"무릎은... 왜요?" 선향이 말했다.

"네 여기에 저의 기를 불어넣고 있어요. 고서에서 기 치료법을 읽었어요. 아픈 부위에 손을 대고 다른 손은 심장에 놓고 아프지 않게 해 달라고 기원하면 심장의 기운이 전해져서 통증이 줄어든대요."

송헌은 눈을 감고 한 손을 자기 심장 위에 놓았다. 다른 손은 선향의 무릎에 놓았다.

잠시 시간이 지났다.

"이제 안 아파요." 선향이 말했다.

"그쵸. 이게 효과가 있나 봐요"

"무릎이 얼얼했는데 이제 괜찮아졌어요. 나도 해주고 싶어요"

"저는 튼튼해요. 아픈데 없어요." 송헌이 말했다.

선향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곧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저를 위해 기를 많이 쓰셨으니까 제 기를 좀 나눠줄게요"

"하하. 그러면 그럴까요" 송헌이 재밌어했다.

선향은 송헌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리고 자신의 왼쪽 가슴 위에 얹었다. 부드럽고 푸근한 감촉이 송헌의 손바닥 전체에 퍼졌다. 온몸에 힘이 들어갔다.


"긴장하지 마요." 선향이 말했다.

송헌의 어깨가 긴장이 풀린 듯 스르륵 이완됐다.

"혹시 오른쪽에 심장이 있는 게 아닐까요?" 송헌이 말했다.

"하하. 심장은 왼쪽에 있어요." 선향이 말했다.

"그쵸. 그런데 100만 명에 한 명은 심장이 오른쪽에 있는 사람도 있대요." 송헌이 아이처럼 웃으며 말했다.

"하하. 알았어요." 선향은 송헌의 다른 손을 끌어왔다. 그러고는 송헌의 손을 덮고 감쌌다. 따뜻한 기운이 온몸에 퍼져갔다. 하나가 된 것 같이 느껴졌다.

비가 어느새 함박눈으로 바뀌어 내릴 때까지 그냥 그렇게 앉아 있었다.


"피곤하죠?" 송헌이 말했다.

"네 조금요"

"저는 어디서 잘 까요"

"제 옆 방에서요. 그리고 부탁이 있어요."

"네 뭔데요"

"방 사이에 문이 있는데 문은 열어두고 자야해요"

"네 그럴게요" 송헌이 말했다.

선향이 활짝 웃었다.


"자요?" 선향이 말했다.

"아니요."

"이 방이요. 거의 3년 만에 불 끈 거예요."

"아 정말요?"

"네 3년이나 지났네요."

송헌은 선향이 다음 말을 할 때까지 잠시 기다렸다. 어슴푸레한 어둠에 눈은 곧 적응했다. 송헌은 방 너머 선향의 실루엣을 보았다. 선향은 송헌 쪽을 향해 비스듬히 누워있었다.


"그 쪽 방은 동생이 쓰던 방이에요."

"그랬군요. 백선호가 동생 이름 맞죠? 어떤 아이였어요?"

"기억하시네요. 네 맞아요. 정말 귀여운 동생이었어요. 치킨을 먹더라도 제 몫을 꼭 남겨줬어요. 나이차가 많이 났어요. 겨우 초등학생이었거든요. 정말 귀여웠어요. 아버지가 동생이 태어나던 해에 이 상가를 지으셨거든요. 그래서 상가 이름이 선호 상가예요."

송헌도 선향 쪽을 향해 누웠다. 선향의 말도 계속됐다.

"살아 있다면 중학교 2학년 일 텐데..." 선향이 말끝을 흐렸다. 잠시 숨을 고른 후 말을 이어갔다.


"동생이 닭다리 좋아하는 거 제가 뻔히 아는데 자기는 뻑뻑 살을 좋아한다며 다리 두 개랑 날개 두 개를 제게 남겨주던 아이였어요. 제가 같이 먹자고 부르면 신나서 달려오곤 했어요. 동생이 너무 착해서 하늘에서 일찍 데려갔나 봐요."

송헌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막연한 아픔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왔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잠들었어요?" 선향이 말했다.

"아뇨. 듣고 있어요" 송헌이 대답했다.

"이렇게 문 열어두고 동생이랑 밤 늦도록 이야기하곤 했어요. 가끔씩 너무 늦게까지 깨어있으면 마루 건너편 부모님 방에서는 '일찍 자라'는 목소리가 들리곤 했어요." 선향이 말을 멈추고 무언가를 찾아 송헌에게 건넸다.

"이게 뭔지 알아요?" 선향이 말했다.

"이거 종이컵 전화 같아요" 송헌이 말했다.

"맞아요. 귀에 대 보세요"

"댔어요."

종이컵 전화기 너머에서 선향이 숨을 고르는 소리가 들렸다.


"사랑해요." 떨리는 목소리가 명주실을 따라 전해졌다.

"네? 뭐라고요? 안 들려요" 송헌이 웃으며 말했다.

"어 이상하다." 선향이 고개를 갸웃했다.

"선향 씨가 한 번 귀에 바짝 대봐요" 송헌이 말했다.

"네 바짝 댔어요"


"나도 사랑해요." 송헌이 말했다.

"송헌 씨는 눈빛 만으로도 나를 편안하게 해줘요." 명주실을 타고 선향의 숨소리까지 송헌에게 전해졌다.


"춥지 않아요?" 선향이 말했다.

"아뇨 따뜻해요"

"송헌 씨"

"네?"

"이리 와서 잘래요? 내 옆에서 자요. 넓고 따뜻해요."

송헌은 이부자리를 주섬주섬 챙겨서 문지방을 넘어 선향의 방에 갔다. 이불을 깔고 선향 옆에 누웠다.


"어때요? 송헌 씨 집하고 이 집하고... 우리 어디서 살 까요?" 선향이 말했다.

"저는 두 곳 다 좋아요. 선향 씨는 어디가 좋아요?"

"저는 송헌 씨 뜻에 따를게요."

"우리 여기서 살아요." 송헌이 말했다.

짧은 정적이 흘렀다.


"우린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요."

"우린 모두 같은 곳으로 가고 있어요"

선향은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감았다.


창문은 동쪽을 향해 있었다. 강렬한 햇빛이 눈꺼풀을 두드렸다. 선향은 송헌의 이불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일어났어요?" 선향이 말했다.

"네, 일어났어요" 송헌이 대답했다.

"새벽에 깼는데 너무 춥더라고요. 그래서..."

"네, 잘 왔어요." 송헌이 이불 속에서 선향을 꽈악 안아줬다.


"조금 더 누워있을까요?"

"네 그래요." 선향이 말했다.

"아침엔 내가 김치찌개 끓여줄게요. 그런데 지금 몇 시죠?" 선향이 물었다.

송헌은 머리맡에 스마트폰을 켰다. 푸르스름한 빛 때문에 미간에 주름이 졌다.

"지금 7시 40분이요" 송헌이 말했다.

"일아나야겠다." 선향이 말했다.

송헌은 일어나려던 선향을 끌어안았다.

"이대로 더 있어요 우리." 송헌이 말했다.

"네 좋아요." 선향은 이불을 끌어당겨 머리끝까지 뒤집어 썼다. 이불 속에서 송헌의 배를 쓰다듬었다. 배가 튼실하다고 좋아했다. 선향은 곧 다시 잠들었다.

송헌은 선향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선향의 새하얀 팔뚝을 끌어당겨 품에 담았다. 작고 여린 어깨는 한없이 갸냘퍼 보였다. 그녀의 심장이 두근두근 뛰고 있었다. 송헌은 선향과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고 싶다고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어스름한 아침이 밝아왔다.


"이제 일어날 시간이에요." 송헌이 말했다. 선향이 잠시 뒤척였다.

"으하암..." 선향이 기지개를 켰다.

"저쪽 보고 있어요." 선향이 말했다.

"네? 아 네..." 송헌이 돌아 누웠다.

"보는 거 아니죠?"

"네, 벽보고 있어요"

"자, 됐어요"

선향은 여전히 하얀 면티를 입고 있었다.

"바뀐 게 없는데요?" 송헌이 말했다.

"잘 때는 위에 속옷을 벗어둬요."

"아... 그래서... 아까..."

"하하. 아까 나를 얼마나 꽉 안아 주시던지 제가 잠을 다 깼어요."

"아, 제가 그랬나요. 하하"

"좋았어요. 앞으로도 날 그렇게 꽉 안아줘요." 선향이 코를 찡긋거리며 말했다.

선향이 무릎을 바닥에 대고 앉아 송헌에게 가벼운 키스를 건넸다. 송헌도 선향의 볼에 입을 맞췄다.


선향은 아직 덜 마른 송헌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을 넣어 정리해줬다. 조수석 거울을 내리고 화장도 했다.

"'쭈'라고 해보세요." 선향이 말했다.

'쭈~'

선향이 송헌의 입술에 보호제를 발라줬다.

"이러면 입술이 트지 않아요." 선향이 말했다. 선향은 반짝이는 송헌의 입술을 보면서 만족스러운듯 미소를 지었다. 아침해가 하늘 높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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