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겨울 (4)

평범한 사랑을 꿈꾸는 두 남녀의 이야기

by 글담

카페 안에는 바퀴가 달린 캐리어를 끌고 있는 사람들, 어깨에 가방을 메고 있는 사람들이 섞여 있었다. 역 앞의 카페가 그러하듯 만남과 헤어짐이 반복적으로 일어났다. 누구도 새로 만나지 않고 아무하고도 헤어지지 않는 눈에 띄는 한 사람이 있었다. 마치 만남과 헤어짐의 경계에 뿌리 내린 나무처럼 보였다. 같은 자리에 몇 시간째 앉아 있었다. 가끔씩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눈을 감은 채 키보드를 쳤다. 갑자기 뭔가 떠오른 듯 노트에 무언가 끄적이기도 했다. 그는 송헌이었다.


송헌을 바라보는 한 사람이 있었다. 카페라떼에 우유를 따르며, 프라푸치노를 만들려고 믹서기를 돌리며, 틈나는 그 짧은 순간을 놓치지 않고 송헌을 바라봤다. 2시간이 지났을 때 그녀는 접시에 비스코티와 갓 내린 에티오피아 예가체프 커피 한 잔을 담아 송헌에게 갔다. 줄을 서있던 손님들이 있었다. 여기 저기서 웅성웅성 댔다. 그녀는 송헌의 볼에 살짝 입을 맞췄다. 무언가 열심히 쓰고 있던 송헌의 오른손 곁에 비스코티 접시와 따뜻한 커피를 조용히 내려놓았다. 웅성웅성 대던 소리가 멎고, '그럴 수도 있지'라고 누군가 말했다. 그녀의 콧잔등과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그녀는 선향이었다.


점심 시간이 되자 기차역 손님에 주변 회사 직원들까지 몰려와 카페는 장사진을 이뤘다. 송헌은 관조하며 커피에게 인간이 좋아하는 어떤 보편적인 면이 있다고 확신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점심시간이 지났다. 손님이 줄었다. 다시 2시간이 지났다. 선향이 송헌에게 조각 케이크를 들고 왔다. 따뜻하게 데운 우유도 곁들였다.


"배 많이 배고프죠?" 선향이 말했다.

"잘 챙겨줘서 배 안 고파요. 선향 씨가 배고프겠어요."

"네 이따가 맛있는 거 사줘요." 선향이 생글거렸다.

"그럼요! 당연하죠." 송헌이 손수건을 꺼내 선향의 콧잔등의 땀을 닦아주며 말했다.

선향은 줄 서 있는 손님 들과 손목 시계를 번갈아가며 봤다.

"난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어요." 송헌이 말했다. 선향이 돌아보며 미소를 지었다.

선향은 능숙한 솜씨로 커피를 만들었다. 그러나 손님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시계는 4시를 가리켰다. 근무 교대할 매니저가 카페로 들어왔다. 셋은 간단히 인사를 나눴다. 선향이 앞치마를 벗고 송헌에게 왔다.

"휴.." 선향이 숨을 골랐다.

모자를 벗으니 앞 머리카락이 땀에 젖어 이마에 붙어 있었다. 송헌은 수고했다고 말하며 선향의 작고 여린 어깨를 토닥여줬다. 선향은 송헌의 팔을 끌어안은 채 머리를 기대고 앉았다. 오른쪽 무릎을 잠시 두드리다가 멈췄다. 그렇게 잠시 앉아 있었다.

"옷 갈아입고 올게요" 선향이 파트너 룸으로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나왔다.


"어때요?"

"우와... 정말 예뻐요." 선향은 연한 분홍색의 원피스 차림이었다. 허리에는 얇은 허리띠가 둘러있었다.

"그런데 많이 추울 텐데 괜찮겠어요?"

"음 그렇겠죠? 그런데 나 오늘 이 원피스 꼭 입고 싶어요"

"그러면 그렇게 해요. 정말 예뻐요."

"고마워요." 선향이 밝게 웃었다.

송헌은 외투를 벗어서 선향에게 입혔다. 밖으로 나오니 추운 바람이 품안으로 파고들었다. 송헌은 다시 카페로 들어갔다.

"내가 차 가져올게요. 여기서 잠시 기다려요." 송헌이 말했다.

"네, 이거 다시 입고 가요"

"네, 금방 다녀올게요." 송헌이 주차장으로 달려갔다.


선향은 연분홍 원피스를 거울에 비춰봤다. 엄마가 첫 데이트할 때 입으라고 이 옷을 사주셨다. 화창한 봄날의 그 날이 기억났다. 거울에 비친 선향 곁에 엄마가 있었다.

선향은 시야가 아른아른해지고 눈 아래가 뜨끈해졌다. 뒤를 돌아 뒷모습을 거울에 비췄다. 아직 원피스에 상품 태그가 달려있었다. 태그를 떼고 눈 화장을 새로 했다. 파운데이션도 바르고 속눈썹도 올렸다. 입술까지 바르고 나니 기분이 나아졌다. 구두를 꺼내 신었다. 원피스를 샀던 그 날 아빠가 사주신 구두다. 코가 둥글고 굽이 높지 않은...


거리로 나가 보니 송헌이 카페 앞에 도착해 있었다. 송헌은 선향이 나오기 편하도록 문을 열어줬다. 송헌은 차 문을 열어주며 외투를 벗어 선향의 다리를 덮어줬다. 송헌은 식료품을 사러 마트에 가야 한다는 아침의 계획이 더 이상 떠오르지 않았다.


"송헌 씨랑은 어디서든 무얼 먹든 다 좋아요." 선향은 어깨를 살짝 움츠리며 말했다.

"우리 제주도에 갑시다."

"좋아요." 선향이 말했다.

공항에 도착했다. 마침 바로 떠나는 비행기가 있었다. 곧 제주도에 도착했다. 선향은 이런 상황이 재밌었다.

"오늘 아침만 해도 내가 제주도에 올지 상상도 못했어요." 선향이 말했다.

"저도 마찬가지예요" 송헌이 말했다.

"호텔 가봤어요? 제주도에서 가장 좋은 호텔이요"

"아뇨."

"우린 거기에 갈 거예요." 송헌이 택시를 잡았다.


"어디로 모실까요." 백발의 택시 기사가 말했다.

"제주도에서 가장 좋은 호텔로 가주세요"

"신혼 여행 오셨어요?"

"네. 맞아요." 송헌이 선향을 보며 말했다.

"내가 관상을 좀 보는데, 두 분은 천생연분이네요"

"맞아요. 그런 것 같아요" 선향이 눈을 감은 채 말했다.


택시는 S호텔에 도착했다. 수평선은 노을과 만나 바다 속으로 녹아내렸다. 스카이라운지로 향하는 조망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선향의 연분홍 원피스에 노을빛이 더해졌다. 눈부시도록 아름다웠다. 높은 곳에 올라 다시 바다를 바라봤다. 바다와 노을이 다시 끌어안고 있었다.


바다가 보이는 자리로 안내받았다. 주방장 추천 요리로 주문 했다. 손을 마주 잡았다. 송헌이 주머니를 뒤적였다. 마주 잡은 두 손을 촬영했다.

"미녀와 야수 같아요" 사진을 보면서 선향이 말했다.

"하하 제가 손에 털이 좀 많아요" 송헌이 멋쩍게 웃었다.

"그래서 더 좋아요. 따뜻하잖아요."

노을이 수평선과 다시 만나 바다 속으로 녹아내렸다.


한 폭의 그림 같은 요리가 연달아 나왔다.

"이게 뭘까요." 송헌이 말했다.

"조개 관자 요리예요" 선향이 대답했다.

"입속에서 살살 녹아 없어져요. 목으로 넘기기 아쉬워요. "

"네 관자는 알맞게 익히는 게 어려워요. 조리를 잘 했네요." 선향이 말했다.


"바다 속에 들어가보고 싶어요." 선향이 말했다.

"그래요. 그럽시다."

"우와 진짜요?"

"그럼요 진짜죠."

"그런데 저 내일 오전에 카페 나가야 해요" 선향이 한숨을 쉬었다.

"선향 씨가 카페 주인은 아니죠?"

"네 아니죠."

"혹시 사직서 처리가 되어야 퇴직금이 나오나요?"

"퇴직금이요? 그런 거 없어요."

"월급제예요? 시급제예요?"

"시급제요. 최저 시급에서 겨우 100원 더 받아요."

"그러면 안 가도 돼요."

"하하 간단하네요."

"네, 의외로 간단하죠. 최저로 대우해주는 아르바이트라면 딱 그만큼만 일해주고 딱 그만큼만 책임감을 가지면 돼요. 대우해주는 만큼 대우해주는 거죠."

"그러면 저 실업자 돼요."

"환영합니다. 이제 좀 쉬어요."

송헌은 선향의 오른 발로 내려가려는 시선을 간신히 거뒀다.


"언제 알았어요?" 선향이 말했다.

"네? 뭐가요"

"제 오른 무릎이요. 인공 관절이란 거 언제 알았어요?"

송헌은 당황한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괜찮아요. 다그치는 거 아녜요"

"제가 좀 민감한 편이라는 걸 미리 알려드릴게요." 송헌이 말했다.

"네 그런 것 같아요"

"처음 만난 날 알았어요"

"그랬군요." 선향은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카페 일은 그만 했으면 좋겠어요" 송헌이 말했다.

"네 저도 무릎에 한계를 느끼고 있었어요."

"그렇죠. 저 혼자 벌어도 둘이 먹고살 수 있어요"

"제가 배운 게 바리스타 일 뿐이라 별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이젠 괜찮아요. 제가 매달 180만 원은 벌어온답니다. 가끔씩 200만 원도 입금돼요"

"하하 우리 정말 부부 같아요." 선향은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그래도 카페 친구들에게 신세를 많이 졌어요. 작별 인사는 꼭 나누고 싶어요."

"네 그래야죠."

"바닷속 여행은 아쉽지만 다음 기회에!" 선향은 송헌을 바라보며 멋쩍게 웃었다.


디저트로 나온 티라미수에서 맛의 향연은 절정으로 치달았다. 선향은 송헌에게 마스카포네 치즈와 초코빵에 스며들어 있는 에스프레소의 조화에 대해 설명했다. 비행기 출발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었다. 공항에서 발매를 해도 충분한 시간이었다.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향했다. 공항에는 어둠이 드리워 있었다. 출발과 도착을 알리는 안내 방송만 한적한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비행기가 이륙하며 둘의 마음도 하늘로 붕 떠올랐다. 선향의 마음은 깃털 같이 가벼워졌다.


"올라가면 우리 혼인신고해요" 송헌이 말했다.

선향은 커다란 눈을 껌벅였다. 송헌이 말을 이어갔다.

"법률혼 관계가 되면 혹시 내가 잘못돼더라도 유족 연금을 받을 수 있어요. 평생."

선향의 눈 밑이 파르르 떨렸다.


'찰싹'

선향이 송헌의 뺨을 때렸다. 그리고 얼굴을 가린 채 울음을 터뜨렸다.

"그런 말하면... 안 돼요. 흑흑. 다신... 다신 그런 말하지 마요." 선향은 눈물이 쉽게 멈추지 않았다. 눈 화장이 눈물에 번져갔다. 송헌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그렇게 한참을 더 울었다. 스튜어디스가 다가와 조용히 크리넥스를 건넸다.

"그런 말 절대 절대 절대로 함부로 하면 안돼요." 선향이 고개를 들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잘못했어요. 미안해요 미안해요"


"한 번만 꼬집어도 될까요?" 선향이 울먹이며 말했다.

"네, 꼬집혀도 싸죠."송헌이 말했다. 선향이 있는 힘껏 꼬집었다.

"..으읍" 송헌은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난 송헌 씨가 먼저 죽으면 따라 죽을 거예요" 선향이 말했다.

"그런 가슴 아픈 소리하지 마요."

"그 말을 들었을 때 제 가슴도 그만큼 아팠어요."

"네, 기억할게요. 미안해요."

"이제 됐어요. 용서할게요" 선향이 송헌의 손을 잡고 악수를 나눴다.


"그런데 선향시 손이 정말 맵네요." 송헌이 멋쩍은 듯이 웃으며 말했다.

"내가 손이 정말 매워요. 조심하세요" 선향이 코를 찡긋거렸다.

"근데... 판다 곰 알아요?" 송헌이 말했다.

"네, 귀여운 곰"

"거울 볼래요?"

"히익... 송헌 씨 잠깐 저쪽 보고 있어요."

선향은 파우치를 꺼내 들고 화장을 고쳤다. 송헌은 비행기 창문에 반사된 선향의 삐죽 나온 입술이 귀엽다고 생각했다. 창 너머에는 도시의 불빛이 보였다. 도착을 알리는 기내 방송이 나왔다. 송헌은 선향을 바라봤다. 연분홍 원피스는 여전히 눈부시도록 예뻤다. 오늘이 선향의 첫 데이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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