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소학독본으로 본 근대식 학교 배움의 틀
교과서 한 쪽에서 “우리 대조선”을 또렷이 불러 세운다. 나라의 생김새와 기후, 땅의 기름짐과 산물을 적어 놓고, 세계 만국 가운데 “우리도 한 나라”라고 말한다. 읽는 마음이 순간 뜨거워진다. 나라가 흔들리던 시절, ‘우리’를 세우려는 간절한 뜻이 문장마다 배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뜨거움은 곧 차가운 질문을 던지게 한다.‘우리’를 말하는 방식이 과연 우리 삶에서 솟아난 배움이었을까? 혹시 ‘우리’를 살리려다, 오히려 근대 국가가 사람을 찍어내는 틀 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간 것은 아니었을까?
1895년 발행된 『국민소학독본(國民小學讀本)』은 근대식 학교가 무엇을 목표로 삼았는지 보여주는 투명한 창이다. 이름부터가 ‘독본(讀本)’, 즉 읽기 교재다. 하지만 실제로는 읽고, 외우고,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그대로 말해야 하는 ‘표준 틀’을 공고히 하는 장치였다.
오늘날 교과서가 배움의 ‘길잡이’가 아니라 ‘정답 꾸러미’가 되어버린 비극은 여기서 시작된다. 아이는 자기 삶에서 질문을 길어 올리기보다, 글 속에 이미 박제된 질문을 받아 안는다. 이때부터 배움은 스스로 묻는 힘이 아니라, 정해진 답을 정확히 되살려내는 재현의 기술로 전락한다.
이 지점에서 나는 ‘일본 닮기’라는 서글픈 단어를 떠올린다. 이는 단순히 교과서 내용이 일본을 찬양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 안에는 애국과 자강의 의지가 충만하다. 문제는 더 깊은 곳, 바로 ‘형식과 운영 논리’에 있다.
국가가 표준을 만들고, 학교가 그 표준을 일방적으로 전달하며, 아이는 그것을 암기하는 흐름. 일본이 먼저 정비한 이 근대식 작동 방식은 ‘우리’를 말하면서도 정작 우리의 말맛과 살맛으로부터 배움을 격리시켰다.
결과는 뼈아프다. ‘국민’을 세우려는 열망은 아이를 스스로 배우는 사람인 ‘배움임자’로 키우기보다, 정해진 ‘국민상’에 끼워 맞추는 교육으로 굳어졌다. 가르침(Teaching)이 배움(Learning)의 멱살을 잡고 끌고 가는 형국이다.
여기에 시험과 선발의 논리가 더해지자, 학생은 ‘국민’조차 아닌 ‘수험생’으로 빚어진다. 교실의 언어도 바뀌었다. “이건 왜 그래요?”라는 본질적인 물음은 사라지고, “이거 시험에 나와요?”라는 생존의 물음이 중심이 된다. 뜻을 나누는 시간은 줄어들고, 옆 동료를 밀어내며 줄을 서는 풍경이 일상이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까. 나는 근대 교과서가 ‘우리’를 세우려 했던 그 뜨거운 뜻은 품되, 그 뜻을 담는 낡은 그릇은 과감히 깨야 한다고 믿는다. ‘독본’의 시대에서 뜻배움(뜻물음-뜻나눔-뜻해냄)의 시대로 나아가야 한다.
첫째, 교과서는 정답 꾸러미가 아니라 ‘물음의 씨앗’이어야 한다.교과서 한 쪽을 읽으며 “내가 사는 곳은 무엇이 같고 다른가”를 묻게 해야 한다. “우리 대조선”을 읽으며 가슴 벅찼던 조상들처럼, 오늘의 아이들은 “우리 동네의 땅과 물, 일과 돌봄은 어떠한가”를 제 입으로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 수업의 중심을 ‘설명’에서 ‘뜻나눔’으로 옮겨야 한다. 배움은 고립되어 외우는 노동이 아니다. 서로의 말을 귀하게 듣고 다듬으며, 두레(공동)의 뜻을 함께 세워가는 잔치여야 한다. 발표와 토론은 수업의 장식이 아니라 배움의 줄기 그 자체가 되어야 한다.
셋째, 평가는 줄세움이 아니라 ‘나세움’이 되어야 한다. 무엇을 외웠느냐가 아니라, 어떤 질문을 던졌고 어떤 자료를 찾아 헤맸으며 그 과정에서 생각이 어떻게 자랐는지를 기록해야 한다. 그래야 배움은 ‘통과해야 할 관문’이 아니라 ‘성장의 무늬’로 남는다.
『국민소학독본』을 다시 펼치면, 그 속엔 여전히 우리를 살리려 했던 뜨거운 마음이 가득하다. 하지만 그 마음이 제대로 꽃피우기 위해서는 그릇을 바꿔야 한다.
‘우리’를 말하는 배움이 ‘우리의 삶에서 직접 묻고 나누고 해내는 배움’이 될 때, 비로소 교육은 낡은 틀을 벗고 새로운 길을 낸다. 나는 그 길의 끝에 이런 문장을 적어두고 싶다.
“줄세움 교육을 넘어, 살맛 나는 나세움 배움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