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봄날, 대한민국 고등학교는?

‘교육개혁’ 말고 ‘배움누림’

안경을 쓰고 보게 된 것들 — ‘교육개혁’ 말고 ‘배움누림’으로

“배운 만큼 ‘선택지’가 달라져요.”

그 말은 달콤합니다. 더 배우면 더 넓게 고를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나는 그 문장을 들을 때마다 마음 한쪽이 서늘해집니다. 이 나라에서 ‘배움’이 아니라 ‘성적’이 선택지를 정해 버리는 순간을 너무 많이 보아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어느 날, 내 아들이 안경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안경을 쓰고서 보게 된 것들이 있었습니다. 칠판 글씨만 또렷해진 게 아니었습니다. 세계가 달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세계가 아들의 안쪽에서 ‘묻기’를 깨우기 시작했습니다.

1. 돌 이야기, 아는 사람?

“엄마, 흑요석 알아?”

나는 멈칫했습니다. ‘돌’이라니. 그저 길가에 널린 것들, 지나치며 밟고 가던 것들.
그런데 아들은 말끝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흑요석이 무엇인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어떤 조건에서 생기는지, 그 결이 무엇을 말해주는지—아들은 자신이 발견한 작은 우주를 설명하듯 또박또박 말했습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장면은 학교에서 일어났다고 합니다.

“선생님이 깜짝 놀랐대요. ‘그걸 너는 어떻게 알았니?’ 하시면서.”

그때 나는 알아차렸습니다.
아들이 말하고 있는 건 ‘수업시간에 배운 내용’이 아니라, 스스로 붙잡은 물음이었다는 걸.

모르는 것을 묻고, 깊이 파고들면 탐구가 되고, 갈고 닦으면 연구가 됩니다.
누구나 호기심은 있습니다. 문제는 단 하나입니다. 그 호기심이 자라나도록 돕느냐, 아니면 조용히 접히도록 만드느냐. 그 갈림길이 지금 고등학교에 놓여 있습니다.

2. 배움의 얼개: 학습–탐구–연구

우리는 ‘배움’을 너무 자주 ‘공부’로만 부릅니다.
그래서 배움이 곧 문제풀이가 되고, 문제풀이가 곧 정답 맞히기가 되고, 정답 맞히기가 곧 성적이 됩니다.

하지만 배움은 더 큰 얼개를 가집니다.

학습: 남이 마련해 둔 길을 따라 기본을 익히는 일

탐구: 내 물음으로 길을 넓히는 일

연구: 나의 답을 삶과 세상에 내놓아 검증받고 고쳐가는 일

이 얼개를 김두루한이 밝힌 대로 한텃말로 바꾸면 더 또렷해집니다.

뜻물음(호기심)

뜻나눔(탐구)

뜻해냄(연구)

이 얼개가 살아 있으면, 학교는 시험 대비 기관이 아니라 나세움 배움터가 됩니다.
이 얼개가 꺾이면, 고교학점제를 말하면서도 결국 줄세움 1.0에 머뭅니다.

고교학점제는 ‘선택’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선택은 종종 성적표의 그림자 아래 놓입니다.

“네가 선택하는 게 아니라, 네 점수가 선택한다.”

학생이 길을 여는 게 아니라, 점수가 길을 가르는 일.
이게 우리가 익숙해진 학교의 표정입니다.

3. 1.0과 2.0의 차이: 방울은 ‘의지’가 아니라 ‘얼개’다

우리는 자주 “마음만 먹으면 바뀐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줄세움은 마음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오래된 물음이 다시 돌아옵니다.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것인가.

방울은 ‘좋은 프로그램 하나’가 아닙니다.
방울은 얼개(구조)를 바꾸는 일입니다.

무엇이 배움을 막고 있을까요.

정기고사 중심의 시간표: 탐구가 자랄 틈이 없습니다.

평가가 판정이 되는 문화: 실패는 자산이 아니라 낙인이 됩니다.

기록이 결과 중심으로 굳는 방식: 과정·시도·수정·성찰이 사라집니다.

교과 칸막이: 삶의 문제는 한 과목으로 오지 않는데, 학교는 과목으로만 받으려 합니다.

부모와 사회의 불안: “그래서 대입은?”이라는 질문이 모든 배움을 줄 세웁니다.

이 구조가 ‘배움’을 ‘학습’으로만 좁힙니다.
그리고 그 좁아진 길 위에서 학생은 스스로 물을 기회를 잃습니다. 뜻물음이 사라지면 뜻나눔도, 뜻해냄도 사라집니다.

그러니 우리가 달아야 할 방울은 이런 것들입니다.

묶음(블록) 시간 확보: 탐구가 가능하도록 배움시간을 묶기

중간나눔(중간 점검): ‘의무’가 아니라 배움의 숨으로 넣기

성장 기준표(루브릭): 판정이 아니라 성장 기록의 틀로 통일하기

정기고사 없앰: 결과보다 과정·기여·협력·성찰이 보이게 하기

칸막이 선택 → 통융합 주제 선택: 삶과 잇는 길을 열어 두기

이게 고교학점제 1.0을 2.0으로 바꾸는 방울입니다.

4. ‘교육개혁’이 아니라 ‘배움누림’

요즘 나는 ‘교육개혁’이라는 말이 자주 공허하게 들립니다.
개혁은 대개 위에서 아래로 떨어집니다. 그러나 배움은 아래에서 위로 자랍니다. 학생의 호기심에서, 교사의 질문에서, 가정의 믿음에서, 지역의 삶에서 자랍니다.

그래서 이제는 이름을 바꿔야 한다고 믿습니다.

교육개혁이 아니라 배움누림.

배움누림은 성적을 버리자는 말이 아닙니다.
성적을 배움의 주인 자리로 올려놓지 말자는 말입니다. 성적은 기록의 한 조각일 수는 있어도, 아이의 가능성 전체가 될 수는 없습니다.

엄마인 내가 바꾼 건 ‘성적’이 아니라 아들의 가능성이라고, 누군가 말했습니다.
그 말이 울리는 까닭은 분명합니다. 가능성은 점수표에 적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능성은 묻는 힘, 파고드는 힘, 함께 나누는 힘, 끝내 해내는 힘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5. 2026 봄날, 고등학교는 무엇을 ‘보게’ 할 것인가

안경은 단지 눈알거울(렌즈)이 아닙니다.
안경은 보는 방식을 바꾸는 장치입니다.

대한민국 고등학교도 이제는 그런 안경을 써야 합니다.
시험지의 글씨만 또렷하게 만드는 안경이 아니라, 학생의 삶과 세상을 또렷하게 보이게 하는 안경.

흑요석을 들고서 “이 돌은 이렇게 만들어졌대요”라고 말하는 아이가 있습니다.
그 말을 듣고 “그걸 너는 어떻게 알았니?” 하고 묻는 어른이 있습니다.
아이가 다시 말합니다.

“제가 궁금해서요. 더 찾아봤어요. 친구들이랑 나눴어요. 그래서 이렇게 정리해 봤어요.”

그 장면이야말로, 고등학교가 품어야 할 봄날 아닐까요.

고교학점제를 한다면서도 줄세움에 얽매인 1.0을 끝내고, 학생을 ‘수험생’이 아니라 ‘배움임자’로 세우는 2.0으로 가야 할 때입니다.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까요?
아마 ‘누군가’가 아니라 우리일 겁니다. 학교가, 교사가, 학생이, 가정이 함께. 한 번에 다 바꾸지 못해도, 배움의 얼개부터 바꾸는 쪽으로.

교육이 아니라 배움.
개혁이 아니라 누림.
줄세움이 아니라 나세움.

2026 봄날, 대한민국 고등학교는—
아이들이 다시 “묻는 눈”을 갖게 되는 곳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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