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성적표는 무엇인가
줄세움의 성적표가 진짜일까, 아니면 나세움의 성적표가 진짜일까. 고교학점제가 도입될 때 많은 이들은 학생의 선택권이 넓어지고, 획일적 경쟁에서 벗어나 각자의 진로와 적성에 맞는 배움이 가능해질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현실은 그 이상과 다르게 흘러가고 있다. 선택권이 넓어지면 자유가 커질 것이라는 믿음은, 입시라는 구조 앞에서 다시 한 번 벽에 부딪힌다. 선택은 자유가 아니라 전략이 되고, 전략은 다시 사교육의 상품이 된다. 윤석범과 같은 교육 칼럼니스트들이 지적하듯, 고교학점제는 사교육을 줄이기는커녕 오히려 더 정교하고 고도화된 형태로 재편시키고 있다.
2028학년도 대입 개편은 이러한 흐름을 더욱 가속한다. 대학은 학생이 어떤 과목을 선택했고, 그 선택을 통해 어떤 학업적 맥락과 성장을 보여주었는지를 평가하겠다고 말한다. 겉으로 보면 이는 줄세움식 평가에서 벗어나겠다는 선언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기록’과 ‘전략’이 새로운 경쟁의 장을 만든다. 단순히 문제를 잘 푸는 학생이 아니라, 어떤 과목을 왜 선택했고, 그 과정에서 어떤 탐구를 했으며, 어떤 태도를 보였는지를 증명해야 한다. 이 증명 과정은 다시 사교육의 전문 영역이 된다. 선택과목 컨설팅, 학생부 기록 관리, 전공 적합성 설계 같은 새로운 시장이 생겨난 이유다.
그렇다면 진짜 성적표는 무엇인가. 제도 자체가 아니라, 제도가 입시 구조 속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가 학생의 미래를 결정한다는 말은 절반의 진실이다. 나머지 절반은, 그 구조가 결국 ‘줄세움’이라는 오래된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름만 바뀌었을 뿐, 경쟁의 방식은 형태를 달리해 계속된다. 문제풀이 경쟁이 기록 경쟁으로, 기록 경쟁이 전략 경쟁으로 이동했을 뿐이다. 줄세움의 성적표는 여전히 살아 있고, 나세움의 성적표는 그 틈에서 겨우 숨을 쉰다.
그러나 우리는 질문을 바꿔야 한다. “어떤 성적표가 진짜인가”가 아니라, “왜 우리는 여전히 줄세움 성적표만을 진짜라고 믿는가”라고. 고교학점제의 본래 취지는 학생이 자기 삶의 방향을 스스로 설계하도록 돕는 데 있었다. 하지만 입시 구조가 그 취지를 가로막는다면, 바뀌어야 할 것은 학생도, 교사도, 학부모도 아니라 바로 그 구조다. 줄세움의 성적표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 어떤 제도도 본래의 목적을 실현하기 어렵다.
나세움의 성적표는 줄세움의 성적표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그 너머에 있다. 학생이 스스로 선택한 배움의 과정이 존중받고, 그 과정이 대학 입시의 도구가 아니라 삶의 기반이 되는 사회. 그 사회를 향해 제도가 움직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또 다른 이름의 경쟁을 반복할 뿐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제도의 미세 조정이 아니라, 경쟁의 방향을 바꾸는 용기다. 줄세움에서 나세움으로의 전환은 교육 정책의 변화가 아니라, 교육을 바라보는 사회적 관점의 변화에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