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같음’의 허울을 벗고, 나세움의 참배움으로

1등부터 꼴찌까지 한 줄로 세우는 가짜 평등의 시대를 끝내자

우리는 교육의 기회균등을 말하며 ‘똑같음(평등)’을 최고의 가치로 치켜세운다. 하지만 고등학교 교실에서 목격하는 평등은 종종 무색투명한 폭력이 되곤 한다. 모든 학생에게 동일한 교과서, 동일한 시험지, 동일한 평가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 과연 정의로운가? 김두루한의 ‘참배움론’과 조동일의 ‘대등’ 철학에 비추어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획일적 평등의 허구를 파헤쳐보자.


김두루한이 제창한 ‘참배움’은 남이 정해준 지식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가짜 배움’에 반대한다. 참배움은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자기 삶의 맥락 속에서 참(진리)을 깨쳐가는 임자누림(주체적) 과정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학교는 똑같음(평등)이라는 명목 아래 모든 학생을 하나의 규격화된 틀에 가두려 한다. 조동일은 이를 ‘평등의 한계’라고 지적한다. 모두에게 같은 옷을 입히고 같은 신발을 신기는 것은 겉보기엔 공정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각자의 체격과 자질을 무시한 강요에 가깝다.


이 평등의 폭력은 교실에서 날마다 벌어진다. 말꽃(문학) 시간, 한 학생은 시의 상징 구조를 논리적으로 분석해 칠판을 가득 채웠다. 반면 다른 학생은 시 한 구절을 읽고 “이 문장은 마치 비 오는 날 엄마가 우산 씌워주던 느낌이에요”라고 말했다. 교사는 첫 번째 학생에게는 칭찬을, 두 번째 학생에게는 “그건 근거가 부족하다”고 말했다. 그 순간 교실은 조용히 갈라졌다. 논리적 언어를 잘 다루는 학생은 ‘우수’가되고, 감각과 경험으로 읽는 학생은 ‘부족한 아이’가 된다. 같은 시를 읽고도, 같은 교실에 있어도, 평등은 그들에게 전혀 다른 얼굴로 다가온다. 수학적 직관이 뛰어난 아이와 예술적 감성이 풍부한 아이를 하나의 성적표로 줄 세우는 평등은, 결국 누군가를 필연적인 패배자로 만드는 구조적 불평등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참된 배움의 지향점은 획일적 평등이 아닌 ‘나세움(대등)’에 있어야 한다. 대등이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한 상태에서, 그 차이가 결코 어느 한쪽의 비굴함이나 우월함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조건을 맞추는 것이다.

고교 현장에서 이를 실현하려면 ‘골대의 높이’를 조정해야 한다. 키가 큰 학생과 작은 학생이 함께 농구를 할 때, 작은 학생에게 더 낮은 골대를 제공하는 것은 특혜가 아니다. 각자가 자신의 방식대로 최선을 다해 ‘골’을 넣는 기쁨, 즉 배움누림을 맛보게 하려는 배려이자 정의다.


저마다 나를 세우며 서로 다름을 인정함이 보장될 때 비로소 참배움이 일어난다. 교사와 학생, 혹은 성적이 좋은 학생과 부족한 학생이 수직 위계에 놓인다면 배움은 권력의 전달로 변질된다. 하지만 우리가 서로를 ‘나세움 임자(대등한 주체)’로 바라본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시를 읽으며 풀이(해석)를 놓고 그 논리 근거에 따라 서로 뜻을 나누며 마주이야기를 하는 배움방에서 어찌 전교 1등과 꼴찌가 있을 수 있을까? 그것이 바로 참배움이 숨 쉬는 현장이다. 여기서는 누구도 낮아지지 않으며, 각자의 배움은 그 자체로 가치를 지닌다.


결국 똑같음(평등)은 수단일 뿐 목적이 될 수 없다. 우리가 좇는 목적은 모든 학생이 제 나름의 결대로 자라며 서로를 마주하여 존중하는 두레를 만드는 것이다. 1등부터 꼴찌까지 한 줄로 세우는 가짜 평등의 시대를 끝내고, 수만 개의 서로 다른 골대가 존재하는 대등한 참배움의 배곳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때 비로소 우리 아이들은 남을 이기기 위한 공부가 아닌, 나를 찾고 누리를 사랑하는 진짜 배움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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