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고사 없는 고1 흥민이의 나세움 주제배움
흥민이는 고1이 되자마자 “중간고사 범위표”부터 찾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담임이 말했다.
“이번 학기엔 중간고사 없어요. 대신, 나세움 주제배움으로 갑니다.”
교실이 술렁였다. 누군가는 환호했고, 누군가는 불안해했다. 흥민이도 그랬다. 시험이 없다는 건 자유 같았지만, 동시에 방향을 잃을까 두려웠다. ‘그럼 나는 뭘로 내 실력을 보여 주지?’
첫 주는 ‘주제 고르기’가 아니라 ‘삶을 읽기’였다. 선생님은 칠판에 한 줄을 적었다.
“우리의 하루를 바꾸는 문제는 무엇인가?”
흥민이는 핸드폰 화면을 내렸다. 아침마다 마주치는 동네 버스정류장, 배차 간격이 들쭉날쭉해 늘 지각할까 조마조마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친구들은 “그건 그냥 운이야”라고 했지만, 흥민이는 이상하게 그 말이 싫었다. 운으로 넘기기엔, 매일의 시간이 너무 소중했다.
모둠을 꾸리고 첫 문장을 정했다.
“버스가 늦는 건 개인의 지각이 아니라, 동네의 구조 문제일 수 있다.”
그리고 질문이 달라졌다.
어느 시간대에, 어느 정류장에서, 얼마나 늦는가?
그 늦음이 누구에게 더 크게 불리한가?
‘늦지 않게’ 하려면, 개인이 아니라 무엇이 바뀌어야 하는가?
이때부터 교과는 ‘칸막이’가 아니라 도구가 됐다. 수학은 시간 기록을 그래프로 바꾸는 데 쓰였고, 사회는 교통 정책을 읽는 데 쓰였고, 국어는 인터뷰 질문지를 다듬는 데 쓰였다. 과학 시간에는 “정류장 위치와 신호 체계가 흐름에 주는 영향”을 간단한 모형으로 살폈다. 흥민이는 처음으로 “공부가 한 덩어리로 붙는 느낌”을 알았다.
둘째 주에 선생님이 말하자 모두가 놀랐다.
“평가기준은 내가 주는 게 아니라, 너희가 함께 세워요. 이름하여 기준글.”
흥민이 모둠은 기준글을 세 줄로 적었다.
사실: 기록과 자료로 말할 것
해석: 왜 그런지 원인을 여러 갈래로 살필 것
제안: 바꿀 수 있는 해법을 작게라도 내놓을 것
그다음은 뽑아살핌. 다른 모둠이 흥민이 모둠의 초안을 읽고 말했다.
“늦는 횟수는 잘 쟀는데, 왜 늦는지에서 ‘느낌’이 많아.”
흥민이는 얼굴이 화끈했지만,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누가 틀렸다고 찍어 누르는 말이 아니라, 더 나아가자고 손 내미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은 다시살핌길. 흥민이는 버스기사님과 짧게 인터뷰를 했다. “배차보다 신호가 더 문제”라는 말, “민원이 들어와도 바뀌기 어렵다”는 말이 뼈처럼 남았다. 그제야 자료가 말이 되기 시작했다. ‘늦음’은 누군가의 게으름이 아니라, 구조가 만든 반복이었다.
학기 중반, 학교는 ‘나눔마당’을 열었다. 학부모, 동네 주민, 구청 관계자까지 왔다. 흥민이는 떨리는 손으로 첫 문장을 읽었다.
“저희는 지각을 줄이기 위해 공부한 게 아니라, 지각을 만드는 조건을 바꾸기 위해 배웠습니다.”
발표가 끝나고 누군가가 물었다.
“그래서 너희가 낸 해법은 뭐야?”
흥민이는 준비해 둔 작은 제안을 꺼냈다.
특정 정류장 혼잡 시간대에 임시 안내 표지(서 있는 줄 분산)
신호 대기 긴 구간에 대한 민원 ‘증거 묶음’ 제출 방식(시간·영상·기록 표준화)
학교 지각 처리 방식도 ‘개인 벌점’이 아니라 ‘교통 사정 확인’ 절차 마련
대단한 혁신은 아니었다. 하지만 흥민이는 처음으로, 배움이 “정답 맞히기”에서 “세상을 조금 움직이기”로 건너가는 감각을 느꼈다.
오히려 평가는 더 자주, 더 가까이 있었다. 친구의 문장에 기대어 고치고, 자료의 빈틈을 메우고, 말의 책임을 배우는 과정. 흥민이는 알게 됐다.
줄세움 시험이 사라지고, 나세움 배움이 살아난 것이었다.
학기 끝 무렵, 흥민이는 자기 기록장 마지막 줄에 이렇게 적었다.
“나세움 주제배움은 나를 드러내는 일이 아니라, 나와 우리가 함께 나아가는 길을 찾는 일이었다. 점수로 서열을 세우는 대신, 기준글을 세우고 뽑아살핌으로 다듬고 다시살핌길로 고쳐 가며, 나는 ‘수험생’이 아니라 ‘배움임자’가 되었다.”
중간고사가 없는 고1 흥민이의 한 학기는 그렇게 끝났다.
하지만 흥민이에겐 끝이 아니었다. 이제 그는 시험 날짜보다 더 또렷하게 묻는다.
“다음엔, 우리 동네에서 무엇을 함께 바꿔 볼까?”
현재 2022 고1 과정은 공통과목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칸막이 교과목이 아니라 융합선택과목으로 배울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