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에는 휴일이 없잖아요
여름휴가를 지내고, 추석과 대체공휴일, 이어진 개천절과 한글날까지. 아주 근사하고 풍성한 나날들이었다.
비록 명절에 시댁에 가야 했어도, 개천절에 아무 데도 놀러 가지 않고 그냥 집에만 있었어도, 그 많은 휴일의 전후로 엄청난 양의 업무를 처리해야 했어도. 그래도 여전히 쉬는 날이란 것은, 회사에 가지 않는 날이란 것은 내게 아주아주 좋은 에너지를 주는 존재였다.
일이 조금 빡세도 '이달엔 연휴가 있으니까 조금만 참자.'라든가 '이틀 뒤면 빨간 날이야!'와 같은 아름다운 위로를 스스로에게 건네며 어떻게든 버틸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한글날을 마지막으로 직장인들에게는 낙이 사라졌다. 아무리 달력을 요리조리 뜯어봐도 휴일이 보이지 않는다. 그동안 충분히 쉬었으니 이제 그만 일을 할 때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충분한 쉼'이라는 게 어디 애초에 가능한 단어인가.
특히 11월은 내게 유독 막막한 달이다. 학창 시절 1월부터 12월까지의 영어 이름을 외울 때 이런 의미부여를 했기 때문이다.
11월에는 빨간 날이 없어.
없으니까 노(No)벰버.
그렇다. 노벰버가 다가오고 있다. 평소랑 똑같이 일을 해도 지루하고 지겨워 괜히 시간이 잘 가지 않는 계절. 휴일이 많은 시기보다 하루에 집중된 업무량은 오히려 적을지도 모르는데, 쉬는 날이 없다는 이유로 의욕까지 저하되는 것이다. 나라는 인간에게 동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래 봬도 직장인 8년차. 해마다 나를 잠식하는 노벰버 증후군에 호락호락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어 방도를 마련했다. 나의 11월 생존전략은 바로 '티켓팅'. 비행기 티켓을 예매하는 것이다.
20대 때는 주로 저렴한 2박3일짜리 제주행 티켓을 끊었다. 금요일 연차를 내면 목요일 퇴근 후에, 연차가 없으면 금요일 퇴근 후에라도 떠나면 그만이다. 꼭 11월이 아니어도 좋다. 10월이 되었든 12월이 되었든 일단 머지 않은 미래로 여행을 잡는 것이다. 그러면 남은 시간은 어떻게든 버텨진다. 심지어 아주 즐거운 마음으로. (물론 비수기인 11월이 항공권은 더 저렴하긴 하다.)
최저가 항공권을 알아보고, 숙소는 어디로 할지 고민하고, 어떤 맛집에 갈까 리스트를 뽑아보면서 하루하루 유쾌하게 보내다 보면 어느새 공항으로 향하는 날이 온다. 여행을 준비하고 기다리는 이 마음이 어찌나 달콤한지, 막상 여행을 시작하고 나면 모든 것이 시시해지기까지 한다.
30대가 되고 나니 동남아 티켓도 종종 발권하게 되었다. 스케일이 조금 커졌다고 준비할 것도 늘었다. 이젠 면세점에서 뭘 살지, 비키니를 위해 다이어트는 어떻게 해야 할지, 돌아오는 날 기념품은 뭘 살지까지 고민해야 하니 한 3개월은 끄떡없이 버틸 수 있다. (그렇다. 나는 두달 뒤에 세부에 간다. 야호!)
여행에 갈 시간이나 비용이 부족할 땐 콘서트나 뮤지컬을 예매하기도 한다. 단, 나의 최애가 등장하는 것이 효과가 좋다. (예를 들면 H.O.T. 라든가 혹은 에쵸티라든가 또는 우리 오빠들이라든가...) 응원구호를 외우고, 굿즈를 구매하고, 당일 입을 의상을 고민하면 한 달쯤이야 지루하지 않게 보낼 수 있다.
물론 나의 전략에도 부작용은 있다. 여행 뒤의 후유증이 크다는 것. 하지만 그 후유증이 찾아올 때, 또다시 티켓팅을 하면 된다. 헤헷! 이런 루틴이 반복되면 아무래도 재산을 탕진하게 되니 이 또한 주의해야 할 점이다. 하지만 때로는 그렇게 돈을 쓸 일정을 잡고, 그 일정을 위해 한동안 돈을 아끼는 저축의 세포가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신상 트렌치코트를 입는 대신 바다거북이와 고래상어를 만나는 것이다.
소소하다면 소소하고, 거창하다면 거창한, 인생을 적당히 즐기고 또 적당히 인내하며 살아가는 나의 개인적인 취향. 오늘도 나는 고단하고 지루한 일상을 반짝반짝 빛나는 세부 바다 사진으로 이겨낸다. 기다려라, 고래상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