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들린 사랑 009

2.홍염 #2 휘모리

by 베가






언제부터 벨이 울리고 있었던걸까.


옛 생각에 잠겨있었던 탓에, 전화가 걸려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은현으로부터 걸려온 부재중 전화가 세 통이나 찍혀있음을 확인한 선화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왠일이지? 보통은 전화를 안 받으면 일하는 중이겠거니, 회신이 올 때까지 기다리던 사람이.


무슨 급한 일이 생겼구나. 신호음이 울리자마자 전화를 받은 은현의 긴장한 목소리가 그것을 재확인시켜주었다.


“어, 왠일이야? 답지 않게 전화를 계속 하고.”


“선화야. 네 도움이 필요해.”


올 것이 왔구나. 서로 알고 지낸지 칠 년이 다 되어가는데, 처음으로 듣는 부탁의 말이었다. 점점 더 거세게 고동치는 맥박을 느끼며, 선화는 심호흡을 했다.


“뭐든지 말만 해. 내가 뭐를 해줄까?”


“너, 가야금 요즘도 타고 있지?”


“금방도 갖고 놀았어. 그건 왜?”


“음, 그러면. 살을 한달동안 한 오키로만 뺄 수 있겠니?”


이게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지? 뭐를 시키려는건지 종잡을수가 없어 열심히 머리를 굴려 보았다. 그러나 은현의 의도를 도무지 알수 없었다.


“하… 뭐, 야식 끊으면 될 것도 같애. 근데, 왜 살을 빼야 되는데?”


“너랑 나랑 무대에 서야 되거든.”


“…?!”


“국악 퍼포먼스 그룹으로. 음악 방송에 나가야 돼. 가능한 한 빨리.”


화우당의 신녀가.. 실성한건가? 아니면, 무슨 유튜브 컨셉인가? 혹시, 몰래 카메라? 혼란에 빠져있는데, 그 뒤로 들려온 말은 더 가관이었다.


“해금이랑 대금도 한 명씩 구해야돼. 전부 신자매로. 후보는 좀 있는데, 하려고 할진 모르겠어. 넌 누구 아는 사람 좀 없니?”


이상하다. 유명세를 원하지 않는 줄 알았는데. 용하다는 소문에 온갖 방송 섭외가 들어와도 꿈쩍않던 은현이 아니던가. 무슨 꿍꿍이가 있는게 분명했다.


“번갯불에 콩볶아먹니? 무슨 일인지를 알려줘야 돕지.”


“자세한 건 만나서 얘기하자. 다음 주에 내려갈게.”


이런 패턴은 처음이다. 은현답지 않은 급작스러움에, 선화의 얼굴이 점점 찌푸려졌다.


“아, 참. 이거, 굉장히 위험한 일이야. 싫으면 안 해도 돼.”


여기까지 들은 선화는, 내면에서 점점 고조되던 당혹스러움이 급속도로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정말로 이상하지만… 뭔가 있구나.


“…너는.”


“응?”


“위험하다며. 너는, 꼭 해야되고?”


“나는 혼자서라도 할거야.”


뭐가 이래. 빈 틈이 없네. 비장하고 결연한 은현의 대답에, 선화는 펼치고 앉은 교자상이 뒤집어질 정도로 큰 한숨을 쉬었다.


“대단하네. 다음 주까지 끌거 뭐 있냐? 내가 내일 올라간다.”


“선…”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린 선화는 문갑에서 망건을 꺼내 머리를 싸맸다. 그리고 두 눈을 질끈 감고서 성주대감께 고하는 경을 읊었다.


“할배요. 퍼뜩 알려 주이소. 저 가시나가 살짝 이상한데. 내사 막을 수 있겠는교?”


전안에 켜둔 기도초 여러 자루가, 질문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세로로 길게 타올랐다.


“그라모 됐네. 옥수를 한 며칠 못 갈겠고마. 죄송합니더.”


긍정의 의미로 알고서 망건을 풀려는데. 전안의 기도초에서 뻗어나온 그림자들이 360도로 벽면을 회전하기 시작했다. 노기와 불안이 느껴지는 신의 조화에, 선화는 피가 얼어붙는 듯한 공포를 억누르고 재빨리 무릎을 꿇었다.


“할배요. 진정하소. 와 이라는교. 내보고 우짜라고…!”


불꽃이 이리저리 뒤엉키며 마구 헝클어지더니, 이어 그림자의 촛점이 선화에게로 맞춰졌다. 쓰고 있던 망건의 당줄의 매듭이 스르륵 풀려 하늘로 솟구치는 것을 보고 선화는 기겁을 했다. 가느다란 당줄은 점점 두꺼워졌다. 그러나 머리에서 떼어내려고 손을 갖다댄 당줄은 본래대로 가늘었고 평소처럼 아래로 드리워져 있었다.


선화는 몸주신으로 모시는 성주 대감의 뜻을 불현듯 알아차렸다. 그림자로 보라시는 거구나. 차렷 자세를 하고서 고개를 끄덕이자, 사람 주먹 만하게 두꺼워진 당줄의 끝부분이 뾰족해지더니 두 개의 뿔처럼 모양이 잡혔다.


”이, 이기 도대체 뭐고?!”


덜덜 떨고있는 양손을 자신도 모르게 머리위로 가져간 선화는 무턱대고 뿔을 붙잡았다. 그리고 그 순간. 끔찍한 화경이 벼려진 칼날처럼 의식세계를 찌르고 들어왔다. 눈동자가 하얗게 까뒤집어진채로 감당 불가능한 미래를 엿본 무녀는 제 자리에 고꾸라져 구역질을 해댔다.


“큰 일이다. 큰일… 이 일을 우짜면 좋노.”


은현에게로 급히 전화를 걸려고 휴대폰을 쥐었는데, 이상하게도 손에서 자꾸만 미끄러져 떨어졌다.


“할배요… 뭐시라꼬요? 아직 말하지 말라고? 아니, 참말로 돌아삐겠네 진짜!”


괴성을 지르다가 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킨 선화는 성주 대감의 타이르는 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 시간을. 알았십니더.”


신복을 거칠게 벗어던진 선화는 운동복으로 갈아입고서 신당을 나설 채비를 했다. 심심하면 길에서 퍼지는 구형 스포티지가 서울까지 장거리를 뛰는 동안 버티게 해달라고 마지막으로 전안 기도를 올리고서 문을 잠그려다가, 문득 섭섭한 마음이 솟구쳐서 성주 대감을 향해 볼 멘 소리를 내뱉았다.


“그만치로 위험하다카면서 내보고 하지 말라고는 안 하네! 참 내. 내 만약에 이번에 죽거들랑 제일 좋은 데로 데리고나 가 주소!”


제자의 앙탈을 듣고 있던 신령은 대답 대신 선물을 내주었다. 덱데구르르 소리를 내며 코앞으로 굴러온 무언가를 재빨리 잡아채서 눈 앞에 가까이 대보던 선화는, 기가 차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녹슬고 찌그러진 상평통보 당오전이었다.


“할배, 노망났네! 요새 이런걸로는 차에 기름도 못 넣고 라면 한 그릇도 못 사묵는다!


툴툴거리면서도 지갑 안 동전주머니에 신물을 야무지게 챙겨넣고서 신당을 나섰다.


이노무 팔자는 평생 이리저리 치여서 빌어 먹는구마.


긴 싸움이 되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