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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쟁이 엄마 Mar 27. 2019

쥐어짜면 뭐라도 남겠지

변화는 '알면서 안 한 것'에 대한 도전이다.

 잠들기 전까지만 끄적이다 자려고 엎드려 누워 노트북을 열다가 '아 맞다'하며 벌떡 일어나 물 한 컵을 마시고 돌아왔다. 우리 집 정수기는 4개월 주기로 필터 점검을 해주는데 연이어 두 번이나 내부에 얼음이 커다란 도넛 모양으로 꽁꽁 얼어 있었다. 점검자 분이 말씀하시길

"물을 진짜 많이 안 드시나 봐요."

정수기에서 물이 잘 안 나가면 순환의 문제로 얼음이 생긴다고 했다. 사실 더 자세한 원리를 설명해주셨으나 내가 이해하기 쉬운 방식으로 그렇게 요약해버렸다. 처음엔 그러려니 했는데 두 번째도 같은 말을 듣게 되니 갑자기 내 몸이 바짝바짝 타들어가는 느낌이 들어 의식적으로 물을 마시기 시작했다. 4개월 후에는 그 얼음 도넛이 없기를 기대하는 중이다.


 물을 하루에 2리터 이상 마셔야 살도 빠지고 건강해지고 머리도 잘 돌아간다는 것을 잘 알지만 고개만 주억거릴 뿐 실천은 잘 안 된다. 그 외에도 잘 알면서도 잘 안 되는 것들은 참 많다. 남편이 가끔 싱크대 테두리의 물 때를 보며 '여기 좀 닦아야겠다~'라고 말하면 늘 '그러게'라고 대답만 할 뿐이다. 집안일 중에 설거지는 좋아하는 편인데도 평소에 설거지를 할 때마다 물 때가 잘 안 끼게끔 테두리를 닦을 뿐, 마음을 먹고 싱크대 전체의 물 때를 청소하는 것은 어쩐지 미루게 된다. 어느 주말 아침, 남편은 눈을 뜨자마자 싱크대 물 때를 닦았다. 누렇게 변한 빨랫감들을 보면서 '얘네는 한 번 삶아야겠다.'라고 말하는 남편에게 '해야지'라고 말해놓고는 한 참이 지났다. 또 어느 주말 아침, 남편은 눈을 뜨자마자 커다란 들통 안에 알 수 없는 비법 소스를 넣고 그들을 뽀얗게 변신시켰다. 설거지, 청소, 요리, 일반 빨래 등 매일 하는 집안일은 제법 부지런을 떠는데 물 때, 창가 때, 화장실 때, 누런 때, 베란다 때, 그런 '쌓인 때'들을 제거하는 것은 대부분 남편의 몫이 되어버렸다. 작업복을 입고 미처 내가 손대지 못한 더러운 때를 제거하는 남편의 모습을 보면 그렇게 섹시할 수가 없다.


뭐, 더 할 게 남았나? 출처 : 더티섹시

 그래도 요즈음 '해야지'라고 말만 하던 운동을 시작했다. 고등학교 2~3학년 때를 제외하면 임신 전까지는 특별히 운동을 하지 않아도 날씬했기에 살이 찐 것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날이 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이가 돌이 되기 전까지는 주변 사람들이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살이 빠질 거라고 희망을 주었다. 그러나 지금 아이가 두 살로 향해가는 이 시점까지 내 몸이 조리원 퇴소 때와 그대로인 것을 보고는 이제 그런 말들은 쑥 들어가 버렸다. 아이의 접종 때마다 일말의 기대를 갖고 슬며시 몸무게를 쟀다가 충격만 반복적으로 받고 난 후부터는 차라리 모르고 살자고 다짐하고 안 재어 본 지 수어 달이 지났다. 나를 안 지 얼마 안 된 사람들은 '살이 많이 찐 거라고?'라며 감사한 반문을 하고 나를 오래 알고 지낸 사람들은 '제법 쪘네.'라고 말하는 딱 그 정도의 미워하기에도 사랑하기에도 애매한 몸이다.


 남편은 늘 콕 집어 말했다.

 "살 빼려는 노력은 하지도 않으면서 맨날 스트레스만 받고 앉았어. 차라리 그럴 거면 만족하고 살든가"

너무나 맞는 말이어서 화가 난다. 항상 궁금한데, 왜 정답 같은 말을 들으면 화부터 날까? 독박 육아로 지치는 일상을 핑계로 운동에 대한 의지는 늘 꺾이고 만다. 어느샌가 나보다 더 뚱뚱한 아기 엄마들을 보며 안도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쇼핑 중에 이 옷 저 옷 입어보다 기가 막힌 모습에 웃다 말고 울음이 터졌다. 임신과 출산을 거치면서 잇몸이 약해지고 골반도 안 좋아지는 등 몇 가지 손해가 있었어도 다 괜찮았는데 생전 안 골라본 사이즈와 디자인을 들추다 보니 설움이 북받쳤다. 운동을 안 한 내 탓은 안 하고 이게 다 애 낳고 이렇게 된 거라며 심술을 부렸다. 남편은 쇼핑몰 길목에서 질질 짜는 나를 보며 남들이 오해하니 제발 그만 울라며 어쩔 줄 몰라했다.


아 진짜 ㅜ 나도 울고 싶지 않다구! 출처 : pann.nate.com

 열흘 정도 됐을까? 2,3일 간격이긴 하지만 집 근처 체육공원에서 번갈아가며 교대로 아이를 보면서 달리기를 하고, 공원 운동 기구로 복부 운동을 한다. 최종 목표는 8킬로그램 감량이지만 일단 올해 봄이 지나갈 즈음에 그의 반 정도 빠지면 성공적이다. 점점 운동 강도를 올려야 가능할 듯싶은데 몸이 무거워져서 쉽지가 않다. 한 때는 가뿐하게 하프마라톤 코스를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완주했는데 이제는 고작 운동장 몇 바퀴 뛰고 난 다음날은 체중 때문에 무리가 가는 것인지 허리가 뻐근하다. 우리를 구경하던 아이도 금세 유모차에서 나와 달리는 시늉을 하며 우리 주변을 돌고 돈다. 아이의 안전을 위해 말랑말랑한 바닥으로 바뀐 농구코트를 운동장 삼아 돌면서 달리는데, 내 눈에만 그렇게 보이는지는 몰라도 아이는 간혹 농구 골대를 보다 공을 튀기는 시늉도 한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참 많이 컸다.'라고 생각하다 보면 반짝 몸이 가볍게 느껴지며 힘이 난다. 운동하러 나오는 시간은 보통 밤 8시 반에서 10시 사이인데 이 시간의 우리 동네는 운동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어서 아이를 꺼내놓아도 계속 주시할 필요가 없어 편안하다. 한 참을 빙빙 돌다가 집에 가려고 유모차에 태우니 더 놀고 싶다며 버둥대던 녀석은 집에 오자마자 재울 필요도 없이 잠들어 코까지 골았다. 아이는 벌써 '우리 가족은 밤마다 뛴다'는 인식이 생겼는지 운동을 못 가고 아이를 일찍 재우는 날에는 침대 위에서 한 참을 제자리 뛰기를 하다가 잠이 든다. 마치 오늘은 왜 운동을 가지 않았냐고 묻는 것처럼.


 숨이 차다 못해 저녁 먹은 게 올라올 것 같은 불쾌함을 누르고 한 번 더 몸을 쥐어짜야 살이 빠지듯이 삶의 변화는 단 한 끗 차이로 결정된다. 눈을 뜨자마자 아이 기저귀 먼저 갈아주고 아침을 먹인 후 커피를 내려 마시며 오전 공부를 한다. 그러다 청소를 시작으로 집안일을 휘몰아치듯이 하다 보면 점심시간이 되어 아이를 먹이며 뒤늦은 첫 식사를 한다. 설거지를 하고 아이와 놀아주다가 아이가 잠 들고나면 집안은 평화로운 정적에 휩싸인다. 가습기에서 나오는 수증기를 바라보며 잠시 멍해지다 보면 피곤함이 몰려온다. 한 끗의 경계선에 서 있는 순간이다. 괜히 집안을 서성이며 피로를 털고 강의를 듣거나 복습을 한다. 저녁 설거지를 마치고 나면 또 한 번 한 끗의 경계선을 마주한다. 운동이고 뭐고 그냥 이렇게 살란다 싶지만 의지를 쥐어짜서 문을 박차고 그 선을 넘어선다. 아이가 밤잠에 들어가면 책을 읽거나 글을 쓴다. 이마저도 정신력으로 한다면 일상이 너무 뻑뻑할 뻔했는데 책과 글쓰기는 기름칠이 되어준다.


아니야. 넌 더 버틸 수 있다구 !  출처 : 러브빈의 소소한 꿈

  나는 참기름보다 들기름을 좋아한다. 참기름과 들기름은 기름병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았을 때는 고소한 향이라는 점에서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요리에 들어가는 순간 그 둘은 완전히 다른 길을 간다. 참기름은 거들먹거리며 가장 마지막에 나타나서 모두를 홀려버리는 주인공이고 들기름은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모르겠는데 파티가 끝나고 나서도 계속 생각이 나는 특정한 누군가이다. 들기름은 음식이 바닥나는 순간까지 진득하고 구수한 맛을 잃지 않는다. 무침뿐 아니라 볶음과 전골요리에도 잘 활용하면 그 맛이 일품이다. 그렇다고 참기름을 넣어야 하는 음식마저 들기름으로 대체하면 안 된다. 그들은 다른 스타일의 대배우이기에 어울리는 작품에 각자 캐스팅되어야 한다. 어릴 때는 어디에서든 참기름처럼 강렬하게 인식되길 바란 면이 없지 않았는데 이제는 오래도록 감칠맛 나는 들기름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낮에 한 번, 밤에 한 번 이렇게 쥐어짜는 일상이 쌓이다 보면 구수하고 향긋한 들기름 같은 뭔가가 남겨질지 모른다. 그렇다. 결국 이 한 마디를 하고 싶어서 느닷없이 기름 타령을 했다.


커버 이미지 출처 : theq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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