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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잠 May 16. 2023

1. 태어나지 않았다면 행복했을까?

내 이름이 남자 이름이라서 같은 입원실을 쓰게 된 아저씨가 있었다. 병원의 실수는 어이없었으나 병실이 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다리에 깁스를 하고 있었던 아저씨는 하루에도 몇 번씩 진통제를 찾았다. 그러면 간병을 하고 있던 여자친구가 조금만 참아보라며 너무 자주 진통제 찾는 것에 대해 걱정을 했다.

여자친구는 키가 크고 머리가 길었다. 열 살밖에 안 되는 내가 보기에도 여자친구는 멋있고 예뻤다. 그녀의 직업은 디자이너였는데 가끔씩 내 공책에  머리가 없는 마네킨이 멋진 의상을 걸친 그림을 여러 장 그려주었다. 난 그 그림이 너무 멋있어서 이다음에 크면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고 했다. 단지 마음에 안 들었던 것은 마네킨그림에 머리가 없다는 것이 마음에 걸려서 여러 장의 그림에 정성껏 머리를 그렸다. 그리고 어떠냐고 그 디자이너에게 그림을 보여주었다. 그녀는 내 그림을 보며 잘 그렸다고 말하고 호탕하게 웃어주었다. 여자는 시원시원하고 활달한 구석이 있는가 하면  아저씨랑 이야기할 때마다 어두운 얼굴을 보이기도 했다.


내가 척추수술을 하고 병실로 돌아왔을 때 아저씨와 여자친구는 안쓰러운 눈빛으로 날 바라보았다. 어리고 비쩍 말랐지만 입은 살아있어 늘 활기차고 씩씩한 나였다. 친언니의 표현을 빌리자면  나는 지나치게 밝은 아이였다. 그런 내가 하루아침에 수술을 하고는 말할 기운도 없이 처져 올롱한 눈망울만 꿈뻑꿈뻑하고 있었으니 안타까워서 그랬을 것이다.

다음날, 여전히 아저씨는 아침부터 진통제를 찾았고 간호사는 병실로 와 아저씨에게 한마디 한다.

옆에 꼬마는 척추수술을 하고도 진통제를 안 찾는데 아무개 환자도 좀 참아보시라고 말이다. 그래? 나는 눈을 번쩍하고 떴다. 아프면 진통제를 찾으면 된다고?

난 알지 못했다. 아저씨가 진통제를 수없이 찾는 것을 들었으면서도 나도 아프면 진통제를 맞을 수 있다는 생각까지는 미처 하지 못했다. 진통제라는 걸 알게 되니 마음이 든든했다.

아는 세계와 알지 못하는 세계는 이렇게 다른 것이었다.


내가 척추수술로 어린 나이에 고생을 많이 해서였을까. 엄마는 뜬금없는 말을 했다. 너를 가졌을 때 낙태하려고 수술대까지 올라갔다가 낳겠다는 결심을 다시 했다. 둘만 낳을 것을… 내가 잘못했다. 너를 낳지 말았어야 했다. 아픈 말이지만 이제난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안다.

나는  딸 셋 중에 막내다. 엄마는 나를 임신하고서 감기약을 먹은 게 마음에 걸렸을 것이다. 내가 이렇게 고생하게 될 줄은 모르고 낳은 걸 후회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자신 있었다. 엄마가 나를 낳은 것을 후회하지 않을 만큼 행복하게 살 자신말이다.  어렸기 때문에 가질 수 있었던 자신이었다.   


병실을 옮기게 되어 멋진 디자이너와 진통제 아저씨를 더는 볼 수 없었다.

후에 나는 알게 된 사실은 아저씨와 디자이너언니는 헤어진 연인사이라고 했다. 진통제아저씨가 갑작스러운 사고를 당해서 수술을 하고 보호자가 필요한데  간호해 줄 사람이 없어서 전여자친구에게 연락을 했다고 했다. 지금이었으면 간병인을 쓰면 되는 일이었지만 당시엔 구하기 힘들었던 모양이다. 어쨌든 딱한 사정을 듣고 잠시 병간호를 해주고 있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사람의 일 어찌 될지 모르는 일이니 모진 말 하지 말고 남에게 상처 주지 말라는 말이 생각난다.

헤어진 여자친구를 그렇게 연락하게 될 줄 진통제아저씨도 몰랐을 것이다.


엄마의 말처럼 내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엄마가 나를 낙태로 보냈다면 나는 그럼 행복했을까?

내가 진통제가 뭔지 몰랐듯 나는 어떻게 되었을지 모른다. 알지 못하는 세계에서 행복했을지 어땠을지는 알 수 없지만 확신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작은 행복들을  절대로 그곳에서는  경험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이다.


내 나이 쉰. 반백년을 사는 동안 깨달은 것은 모든 인연과 모든 상황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내가 존재하는 현재에 모든 것을 쏟아부어야 한다.

죽어서 무엇이 될지 혹은 태어나지 않은 세계에선 행복했을지는 내게 중요하지 않다.

내손에 없는 것을 위해 살지 말고 내게 주어진 오늘에 충실하고 싶다. 깊어가는 밤이면 모든 이들에게 말을 하고 싶어 진다.


오늘도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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