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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on Jun 10. 2022

멋지게 잘 살았다.

테너 엔리코 카루소, 1873-1921

“낡은 테라스에 바람이 불고, 바다가 빛나는 소렌토의 바다. 한 남자가 어린 여인을 껴안고, 그녀가 흘린 눈물에 목청을 가다듬어 노래하기 시작합니다. 당신을 무척 사랑합니다. 정말 많이 사랑합니다. 알고 있소? 지금 이 사랑의 굴레가 내 몸 안의 모든 피를 타들어 가게 합니다.”


테너 엔리코 카루소(Enrico Caruso, 1873-1921)를 추모하는 루초 달라(Lucio Dalla, 1943-2012)의 〈카루소〉(Caruso, 1986)의 가사 중 일부다. 〈카루소〉는 달라가 카루소가 생을 마감한 이탈리아 나폴리 그랜드 호텔 베수비오에서 영감을 받아 단숨에 쓴 곡이다. 노래는 오페라의 한 장면, 죽음을 목전에 둔 카루소가 사랑하는 여인에게 부르는 아리아처럼 애절하다.


지금도 이 곡이 대중적으로 알려져 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한때 노래의 주인공보다 더 유명했던 적이 있었다. 아마도 모 개그맨이 이 곡의 가사를 장난스럽게 바꿔 부르면서 유명해졌던 것 같다. 여하튼 한 음악가를 음악 작품으로 승화한다는 것은 가장 명예로운 일이다. 역사상 최고의 성악가로 평가되는 카루소가 그런 음악가였다.      


테너 엔리코 카루소, 1873-1921


엔리코 카루소는 나폴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항상 술에 취해 있던 노동자였다. 반면에 그의 어머니는 어린 카루소의 꿈을 이룰 수 있도록 항상 용기와 격려를 아끼지 않는 든든한 후원자였다. 카루소는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노동을 하며 힘겨운 청소년기를 보냈다. 학교에서 음악을 전문적으로 배우지는 않았지만, 타고난 재능은 어디서든 빛을 발하기 마련이듯 어린 카루소는 성당의 성가대에서 솔리스트로 발탁된다. 그리고 카루소의 타고난 재능을 알아본 선생들로부터 노래를 배울 기회를 얻게 된다. 그러나 염불보다 잿밥에만 관심이 많았던 선생은 카루소와 불공정한 계약을 맺는다, 결국 법정에서 카루소가 현대판 노예계약에 승소하면서 일단락되었지만, 이러한 송사는 그가 오페라 가수로 성공한 이후에도 끊이지 않았다. 그를 이용하는 사람들로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카루소는 그의 뛰어난 노래 실력 덕분에 군에서 조기 제대라는 특혜를 받기도 했다.


카루소는 데뷔하기 전부터 이미 스타가 될 재목이었지만, 오페라에 대한 기초적인 훈련이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 번 좌절을 맛봐야 했다. 세상은 선한 천사들로 가득한 것일까 아니면 인재를 알아봐서일까, 카루소는 은인을 만나 오페라 무대에 데뷔하게 된다. 그의 첫 오페라는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의 투리두 역이었다. 그는 이 오페라로 세간에 주목을 받았고, 이후 성공 가도를 달리게 된다. 카루소는 이후에도 중요한 인물을 만나게 된다. 대표적으로 지휘자 빈센초 롬바르디(Vincenzo Lombardi, 1856-1914)는 카루소의 불안정하고, 풍부하지 않은 목소리를 보완하고 개선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후 카루소는 모든 배역을 소화할 수 있는 소리를 갖게 된다.


오페라 《사랑의 묘약》 중 아리아 ‘남몰래 흘리는 눈물’

Opera L'Elisir d'amore. aria. Una Furtiva Lagrima

노래 엔리꼬 카루소(1904) 


카루소는 성악가로 자리매김하는 시기에 사랑하는 연인, 소프라노 아다 지에세티(Ada Giachetti, 1894-1946)를 만난다. 그의 나이, 24살 때였다. 내가 그들의 사랑에 대해 왈가불가할 일은 아니지만, 그들의 사랑은 처음부터 잘못된 만남이었다. 지에세티는 당시 유부녀였다. 평생 행복할 것 같았던 결혼 생활은 아내의 외도로 로돌프(카루소)와 미미(지에세티)는 파국을 맞는다. 지에세티의 만남은 푸치니의 오페라 《라 보엠》을 통해서였다. 달라의 노래 〈카루소〉에서 그 “어린 여인”이 지에세티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카루소는 1903년 유럽 무대를 접고, 미국 오페라 무대로 진출한다. 그는 미국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 데뷔와 함께 대중적으로 스타가 된다. 카루소는 오랫동안 미국 오페라 무대의 왕좌를 지켰다. 그리고 이 시기에 성악가로서는 처음으로 음반을 발매하는 영광을 얻게 된다(1902). 당대 최정상의 성악가였던 카루소는 백지수표로 가늠할 수 있는 높은 개런티와 대중에게 숭배의 대상이었고, 사생활은 공개되었고, 연예기획사 못지않은 비서·회계사·운전사·의상담당자·반주자를 고용하는 등 대중 스타의 삶을 살아간다.     


승승장구하던 카루소는 1920년 돌연 은퇴 선언을 한다. 175cm의 건장하고 다부진 체격의 카루소는 타고난 건강을 과신했는지 그 믿음이 오히려 건강을 해치게 된다. 카루소는 줄 담배를 즐겼고, 완벽한 무대와 대중의 기대에 대한 극심한 스트레스와 만성 두통, 오페라 출연의 강행군 그리고 목의 종양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다. 이러한 몸 상태로 1919년 북아메리카 순회공연을 강행했고, 그 와중에 감기가 심해져 몸 상태는 최악으로 치닫는다.  


18년간 활동했던 미국 생활을 청산하고, 고국 이탈리아로 돌아온다. 그리고 1921년 8월 2일 오후 나폴리 그랜드 호텔 베수비오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 순간을 루초 달라()는 〈카루소〉(Caruso, 1986)에서 이렇게 묘사했다. “그래 인생도 끝이 있는 거야, 이제 그는 무대와 인생을 구분하지 않는다네. 오히려 그는 행복을 느끼며 다시 그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네.”


루초 달라(Lucio Dalla, 1943-2012)

〈카루소〉(Caruso, 1986)


죽음의 원인은 늑막염이었다. 48세라는 짧고 굵은 삶을 살다 간 카루소의 삶을 가늘고 길게 살아가고 있는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다. 그럼에도 매스컴에서 보도되는 대중 스타의 삶, 즉 대중에게 신화 같은 존재로서 숭배되고, 호사가들에게는 가십거리가 되는 이중적인 시선에서 그리고 가난한 가정형편에서 타고난 재능과 노력으로 세계적인 스타가 된 음악가들의 성공 신화를 통해 테너 엔리코 카루소의 삶을 가늠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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