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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틴 Jul 26. 2021

언시를 그만둬야 할 지 고민이다.

아니, 영상을 그만둬야 할 지 고민이다.

최종에서 떨어진 이후로 줄곧 드는 생각이었다. 아니, 아마 이 생각은 언시를 시작한 이후로부터 드는 생각이었다. 불확실성과 불안, 이 두 개가 지난 시간을 지배했다. 이것은 한국에서 그저 그런 콘텐츠 제작자로 남느냐, 아니면 내가 만드는 콘텐츠를 자신 있게 내보여줄 회사에서 일하는 가의 문제다.


내가 생각하는 그저 그런 콘텐츠 제작자는 괴리가 큰 사람이다. 매출을 위해 자신의 미감을 활용하고, 심지어 자신의 고집마저 가볍게 꺾을 수 있다. 나는 여기서 괴리가 발생한다. 나는 콘텐츠로 사회적 영향력을 만들고 싶은 목표가 있다. 크건 작건 내가 만들 콘텐츠가 사람에게 어떠한 영향력을 끼치길 바란다. 나는 이것이 고집이고 꺾을 수가 없다. 그런 내게 그저 그런 콘텐츠 제작자가 되는 일은 ‘팔아야 하는’ 콘텐츠를 만들 때다. 좋은 콘텐츠는 자연스레 팔린다. 억지로 팔려고 할수록 팔리지 않는다. 이러한 미션이 없는 회사의 매출을 위한 도구가 기꺼이 될 용기가 나지 않는다.


그런 내게 알맞은 회사는 언론사나 방송사였다. 이것은 내 오랜 꿈이기도 했다. 거대 미션이 있고, 있어왔고, 나 역시 그 미션에 의해 영향을 받은 사람이다. 콘텐츠가 세상을 바꾸지는 않지만, 콘텐츠를 보는 사람들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의 정확한 증명이었다. 평생 배워오고 찾아온 내 삶의 궤적을 배신할 수 없었다. 매체 영향력이 감소했음에도 그런 회사들의 직함을 달고 일을 하는 것은 꽤나 멋져 보였다. 그러니 PD가 된다는 것은 직업으로서 사회적 지위, 개인의 목표 달성 이 두 개를 충족시키는 일인 셈이다.


해가 바뀌고 서류부터 떨어졌다. 패배주의는 그렇게 시작됐다. 모 방송사에서 시작한 ai 면접은 내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ai 면접을 잘 보는 법을 알려주는 유튜브 영상, ai 면접에서 나오는 게임, 이른바 기억력 테스트, 추론 테스트 같은 것을 계속해서 연습했다. 모 방송사는 ‘자기소개 영상’까지 찍어야 한다. 이른바 ‘최신’ 채용 트렌드에 지원자 개인의 아이덴티티는 어디에도 없었다. 이 새로운 지리멸렬함에 나는 얼만큼 더 나를 증명해야 하는지 지쳤다. 그리고 내가 살아온 모든 것들이 계속해서 부정당하는 기분이었다. 온갖 발버둥을 쳐도,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괴로웠다. 그러니, 회사에 입사하고 나서도 과연 내가 영상을 할 수 있는 힘이 있을지 의심이 되었다.


햇수로 14년 째다. 15살에 영상을 만들었고, 대학 때도 신문방송을 전공하고 전미권 공모전에서도 수상했다. 평생을 콘텐츠를 만들며 살아왔고, 콘텐츠를 만드는 일을 통해 인정을 받고 행복했다. 이제 그 영상은 나를 얽매는 족쇄가 되었고, 오랜 꿈은 감옥이 되었다. 사회가 만든 시스템 안에서 영상으로 밥을 먹고 살아갈 수 없다는 게 현실이라면, 아마 나는 여기까지가 아닐까 싶다. 그럼에도 14년이라는 세월이 길고 아까워서 그만둘 수도 없는 게 현실이다. 그러니까, 나도 별 다를 바 없는 취준생 나부랭이라는 것이다.


꿈꾸지 않는 사람만이 이기는 이 구직시장에서, 아마 나는 거대한 사치를 부리고 있던 게 아닐까 싶다. 그런 시스템이라면, 그런 시스템에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 ‘나’를 버리는 것이라면, 앞으로 나는 무엇을 하며 먹고살아야 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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