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에세이
근처에 친구가 왔다는 연락을 받고 이른 저녁 함께 걷기로 했다.
보통 집을 나설 때부터 머릿속에는 여러 생각이 차오르지만
오늘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 어떤 생각도 돌올히 솟지 않는다.
생각이 흐르지 않는다.
정지되었다.
나 역시 생각을 하고 싶지조차 않다.
정물처럼.
나의 방식대로 아는 게 많아질수록 세상이 비극적으로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산책을 나오기 전 책을 바라보고 펼치기조차 쉽지 않았다.
의무감으로 겨우 몇 페이지를 읽었다.
좌절하고 싶지 않은 몸부림이었다.
나는 책을 읽고 즐거움을 느끼고 내가 모르던 것을 알게 되고 숨겨지고 억눌린 타인의 삶을 체험하고 확장되었다며 남모르는 기쁨을 느낀다.
그런데 이를 어떤 일로 세상에 확장할 수 있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나의 방식대로" 아는 게 늘어갈수록 '어, 이러면 안 되는데…, 이건 너무 잘못되었는데…' 싶은 좌절감만 커진다.
아마 나의 방식대로 강화될 뿐이어서 그런 것 같다.
지금 읽는 책은 <한낮의 어둠>이다.
영제는 'Going Dark'.
무척 잘 지은 제목이다.
그러나, 나는 한낮의 어둠에 갇혀 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무척 흥미롭게 읽었는데, 전 세계 '극단주의의 온상'을 다루고 있어서인지
이어지는 장을 다시 읽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이 비극적인 감정에 빠지리라는 것을 알았다.
처음부터 극단주의를 위해 태어난 듯 보이는 사람도 있지만,
그 집단을 뒷받침하는 다수의 평범한 사람이 극단주의에 빠지는 이유는 감정적 결핍과 관련이 있다.
내면의 결핍을 채워주고 삶의 위신을 특정 명분으로서 세워주는 일이라면 그 일을 어떤 도구로서 이룩하느냐는 부수적인 문제로 변모한다.
사실은 어떠한 일을 이루기 위해 어떤 도구를 사용하느냐가 그 사람의 진짜 위신을 구성하는 일인데도 말이다.
문제는 집단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자신이 자행하는 일들이 선봉자의 체제 선전을 위한 여전한 '도구'일 뿐이란 걸 그들은 모른다는 것이다.
그들의 지위는 격상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로 인한 피해는 만연하다.
우리는 천변이 보이는 카페테라스에 앉아 얼마 전 미국에서 일어난 총기사건에 대해 짧게 이야기했다.
책을 읽는 일에는 효용이 필요하다.
책은 세상을 향한 완충제다.
일단은 나 자신의 내벽이 된다. 그건 확실하다.
하지만 때로 좌절하지 않기 위해서는 세상이 실제로 변해야 하고,
나의 단순한 지적 만족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 그 행위로부터 발생해야 한다.
다독가는 아니어도 책을 늘 곁에 두려고 노력했는데, 독서 자체에 회의적인 기분이 드는 건 처음이라 힘들었다.
아니, 세상이 그만큼 힘겹고 그 또한 고통받고 있다는 걸 이해했다.
이건 나의 고통이 아니다.
나는 잠시 무엇을 대리할 뿐이다.
자연은 평온하다.
그러나 오늘은 친구를 기다리며 벤치에 앉아 듣는 새소리도 위안이 되지 않았다.
자연은 그 자체로 스스로 평온하다는 생각을 할 뿐.
자신이 지닌 뜻처럼.
이 평화로움을 대관할 만한 여유나 낙관이 내게 없기에.
그렇다고 특별히 앙심이 생기는 건 아니라는 점에서 어떻게 보면 위안 아닌 위안은 되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