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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산책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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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writer Jun 08. 2022

산책일기 11. 맑은 칭칭거림

연재 에세이



흙 속에 일렬종대로 심겨 솟아난 꽃대를 보면 '풀뿌리 민주주의'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혹자는 그게 언제 적 관념이냐고 되물을지도 모르겠지만

나에게 '풀뿌리'의 '민주주의'로의 치환은 영원한 현재적 관념이다.


어떤 나무는 그 소담한 나무 잎사귀로부터 이미 형상으로서 열매의 무리를 이루고 있다.


비문증이 생기기 전에 보았던 맑은 하늘이 그리울 때가 많지만,

그러나 기억나지 않는다.


무더위가 온 듯하다가, 바람이 무척 시원하다.


산책일기를 쓴다고 일을 벌여 놓고서도 일과가 밀려 있을 때면 매번 '오늘은 건너뛸까?', '이렇게 성실할 필요 없잖아'라고 스스로를 회유한다.

뒤로 물리고 시원한 바람에 몸을 맡기던 때에야 비로소 얼마 전 친구가 남긴 말을 떠올렸다.

모든 것은 마음의 문제라던….


친구는 자기가 정말 내뱉기 싫어하는 말 중 하나가 "시간이 없다"라는 말이라고 했다.


"대부분 시간이 없는 게 아니라 마음이 없는 거야."

"오늘 너 보러 잠깐 왜 못 와? 마음만 있으면 다 해. 시간이 없는 게 아니라 마음이 없는 거야."


세태를 탓하는 게 아니라, 자신한테는 적어도 '시간이 없다'는 통상적인 말이 거짓말이란 걸 안다는 의미였다.


평소 같았으면,

"그런데 진짜 시간이 없어"라고 꼭 우습고 더불어 슬픈 말을 덧붙여 웃음을 자아냈을 것이다.

푸드덕 웃으며 우리만의 유머로 쉽게 묽은 일상의 파편에 종지부를 찍었을 것이다.

실제로 시간이 없어 많은 일을 매번 뒤로 미루는 게 나의 일상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언뜻 감탄할 만한 철학적 통찰에도 엄연한 빈 구석은 존재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는 웬일인지 평소의 나답지 않게,

"네 말이 맞다"라고만 말했다.

그 뒤에 아무 말도 덧붙이지 않았다.


평소의 나답지 않게, 생전 처음으로,

"다 맞다"고, "네가 다 맞다"고 얘기해 주고 싶은 거친 날이어서였다.


정말 마음은 있지만 시간이 없을 때도 분명 있지만,

그건 결국 해야 하는 일의 우선순위를 무엇에 두느냐의 문제이므로, 마음의 문제에 귀속되는 게 맞다.

나의 마음이 가장 먼저 닿는 우선순위에 행동이 쏠리기 때문에 넷째, 다섯째 순위는 자꾸만 다음 날로, 다음 달로, 다음 해로 밀리는 것이다.

결국 내 안에서는 80%짜리 인정이었던 것을 그냥 100%로 인정해 준 것이

돌이켜 보니 100%의 진담인 것으로 드러났다.


친구는 어떤 무겁고 변칙적인 말도 맑고 가볍게 하는 특징이 있다.

같은 말도 내가 했으면 경쾌하다기보다 웅숭그린 일갈이 되었을 것이다.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에는 부처꽃 팻말을 지나치며 매번 부처꽃은 대체 어딨는 건가 싶었는데

간밤에 여름 산타가 와서 긴 꽃대를 장수처럼 무심하게 퍽, 꽂고 갔는지

비로소 오늘 그 너른 돌밭에서 혼자 우뚝 서 칭칭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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