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에세이
이제는 잠시나마 자연을 보기 위해 같은 길도 에둘러 간다.
아무리 바쁠지라도 잠깐의 산보는 가능하다.
나와의 약속이기 때문이다.
문득, '에두르다'의 뜻을 찾아보니 두 가지다.
┃ 1. 에워서 둘러막다
┃ 2. 바로 말하지 않고 짐작하여 알아듣도록 둘러대다
그렇다면 나는 1의 의미로 메모에 '에둘러 가겠다'고 썼을까,
아니면 2의 의미로 썼을까.
보통 '에두르다'는 동사가 '말하다'와 함께 결합돼 사용된다는 걸 상기해 보면 말이다.
사후 부여이긴 하지만, 2의 의미였던 듯하다.
나로서는 그 고집스러운 산책이 '일하기 싫다'고 바로 말하지 못하고 짐작하여 알아듣도록 둘러대는 형태의 마음의 솎음이었다.
사실 '의미의 사후성(후에 새롭게 부여한다는 뜻)'은 그것이 그 의미가 태어난 당시의 진실이든 아니든에 관계없이 사람에게 매우 중요한 능력이다.
프로이트는 이 능력이 한 개인의 자아의 밀도, 즉 인간으로서의 성숙성을 결정하는 중요한 정신적 요소라고 생각했다.
의미를 연결해 스스로와 그 삶을 서사화하는 능력 말이다.
산책일기를 쓴다는 결심을 하기 전이었다면 '이렇게 바쁜데 산책은 절대 할 여유가 없다'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나의 관습은 그토록 유약하고 속에 든 것 없이 부실하다.
산책은 비로소 나의 사후성들을 연결해 주고 맥락화 시켜주는 현현이다.
날은 무척 흐려 햇빛을 볼 수는 없었지만, 소나무의 메시지는 들을 수 있었다.
그 흐린 대기 안에선 소나무가 자신을 보러 온 오늘의 내 삶도 지켜주겠다고,
든든한 방패막이 되어주겠다고, 위용 어린 기세로 모여 기사군이라도 되는 듯 단단하게 드높은 하늘을 막고 서 있었다.
내가 불러내 나와준 것만 같았다.
후에, 그 순간 찍은 사진을 보니, 누가 짙은 회색과 남색 크레파스로 하늘을 연거푸 칠해놓은 것처럼 대기가 까마득하게 어둡다.
그렇다면 아까 내가 그 소나무들 아래서 느낀 위용은,
소나무 자신의 위용이었을까, 소나무 뒤에 드리운 먹구름의 위용이었을까?
두 가지 모두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