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우울을 너에게 남겨줄게.
뮤지컬을 본지 너무 오래되기도 했고, 지금까지 내가 본 뮤지컬들은 주로 큰 공연장에서 많은 배우들이 등장하는 뮤지컬들이었기에, 이번에 본 뮤지컬 <나는 왜 그녀를 사랑하는가> 조금은 낯설게 다가왔다. 뮤지컬 시작 전에 나눠준 작품 설명 글에 해설과 연출가의 말이 적혀있었는데, 김진우 연출가의 극의 의도 부분이 꽤 인상적이었다. 화려한 세트, 항상 있어야 하는 메시지 그리고 상업적인 의도 등등 일반적인 뮤지컬 장르를 따라가고 싶지 않았다는 게 신선했다.
특히 출연진분들 중에 별대사는 없지만, 등장만으로도 낯설게 느껴지는 세 분의 중년 배우들은 극의 컬트적인 부분과 아마추어리즘을 매치하기 위한 등장시킨 인물들이라고 한다. 또한 기대했던 SF적 요소들을 전부다 대사나 배우들의 마임(?)으로 처리해버리는 건 정말 상상도 못한 일이었는데, 처음엔 예산이 부족해서 그런 건가 싶었지만 그것도 연출 의도로 이해하게 되었다.
우선 나는 이 뮤지컬을 정말 재밌게 봤다. 재미를 느낀 이유는 스토리 때문이라기보다는 배우들의 열연 때문이었다 (배우들은 1인 2역, 많게는 1인 5역까지 소화한다). 작은 극단임에도 불구하고 배우들 노래 실력도 출중하고, 특별한 소품 없이 몸짓 발짓으로 다 표현하는 걸 보고 새삼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공짜 티켓은 다 좋지!'라면서 같이 보러 간 친구는 극이 끝난 후 당황스럽다는 말만 연발했다. 이해할 수 없는 장면도 있었고, 소품도 별로 없는 데다가 결말도 애매해서 자기가 뭘 본거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에 비해 나는 공연 정보나 미리 쓴 프리뷰 덕분인지, 결말을 조금 예상할 수 있었고 그다지 당황하진 않았다. 또 극이 끝난 후에 관객들이 이야기하는 걸 대충 들었는데, 주로 결말이 난해하다는 이야기였다.
뭐, 사실 그럴 만도 했다. 뭔가 스토리에 위기 절정 결말이 있어야 하는데, 절정 다음의 결말은 그냥 모든 게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는 거였으니깐 말이다. 결과적으로 변하는 건 없었다. 하지만 어쩌면 당연히 이러한 결말로 이어질 거라고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프리뷰에도 쓴 이야기지만, 애초에 김진우 연출가는 진실을 그대로 보여주고 관객들에게 선택지를 제공하기만 할 뿐, 어느 편도 들지 않는다고 미리 말했기 때문이다.
극에 관해 설명하자면, 일단 SF 디스토피아 장르이다. 극 안에서는 ‘밀양림’이라는 이상적인 세계와 ‘현실 세계’가 공존한다. 밀양림은 알다시피 모든 것이 안전하고 고통이 없는 세계이며 원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곳이다. 밀양림에 사는 사람들은 행복하고, 현실 세계에 사는 사람은 밀양림에 사는 사람들을 부러워한다 (아마도 계급이나 부의 차이로 세계가 갈라지는 것 같다). 하지만 밀양림에 사는 몇몇 사람들 또한 과거에 현실 세계를 경험한 적이 있다.
주인공 유울모는 현실 세계에서 살다가 밀양림으로 다시 돌아온 인물이다. 유울모는 그토록 고통으로 가득했던 현실 세계가 자꾸 떠올라 밀양림과 현실 세계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또 유울모에 할머니 또한 현실 세계를 경험한 자로서, 그녀는 유울모가 현실 세계에서 있었던 일들을 듣고 난 뒤 “우울”이라는 말을 참 오랜만에 들어본다고 말하는데, 그 장면에서 왠지 좀 슬픈 감정이 들었다.
아무튼, 현실 세계에서 밀양림으로 돌아온 주인공 유울모는 밀양림의 좋은 시스템 안에서 잘 살아가려고 하지만, 왠지 모르게 현실 세계에서 춥고 고립되었던 자신이 계속 생각이 난다. 그런 그 앞에 현실 세계를 대표하는 미아보라라는 인물이 나타나고, 그녀를 찾아다니는 과정으로 극이 진행된다. 미아보라는 밀양림을 파괴하려는 인물 중 하나로, 과거에 누군가가 그녀의 몸의 식물을 이식한 탓에 온몸이 나뭇잎과 넝쿨들로 뒤덮였다. 그리고 극의 절정 부분에서, 밀양림을 대표하는 판이라는 인물과 미아보라의 다툼이 시작된다.
애초에 밀양림을 만든 사람은 없어. 하지만 그는 어디에나 있지.
그래서 내가 죽어도 밀양림은 계속 움직일 거야.
-판의 대사 中-
판의 육체는 죽었지만, 몸이 무너져내릴 때의 그의 표정은 매우 기계적이었고 무서움이 들 정도였다. 미아보라는 자신이 그들이 만든 살아있는 표본이었다는 사실에 분노하며 슬퍼한다. 밀양림은 파괴되지 않았고, 현실 세계도 그대로 존재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변하는 건 없었고, 노력은 물거품 돼버렸다. 이식된 식물 때문에 미아보라의 몸은 굳어버리고 유울모는 그녀의 죽음을 지켜보며 숨겨왔던 사랑을 고백하게 된다.
유울모와 미아보라의 듀엣 노래 중 마지막 가사 중 기억에 남는 가사가 있다. 밀양림은 영원할 거라는 판의 말에 처절하게 분노하는 미아보라와 그것을 지켜보는 유울모 간의 대화를 풀어쓴 가사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둘이 같이 노래하는 장면에서 미묘하게 다른 가사를 발견할 수 있다.
미아보라: 이 모든 게 꿈이라면 좋겠어.
유울모: 이 모든 게 꿈이라면 허망해.
유울모가 허망하다고 하는 포인트는 무엇일까? 지금까지 있었던 일, 미아보라를 찾아다니고, 현실과 이상 가운데에서 갈등하던 순간들이 모두 꿈이었다면, 그것은 유울모에게 좋은 일이었을까? 아니다. 결과적으로 미아보라가 죽은 뒤 유울모는 밀양림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지만, 지금까지의 일들이 모두 없던 일이 돼버리는 것은 현실 세계를 잃어버리는 것보다 더 허무한 일일 것이다. 즉 다시 말해서, 결과에 상관없이 자신이 선택한 순간이 물거품 되지 않았으면 하는 그의 바람이다. 나는 극의 결말을 머지않아 밀양림 같은 세계가 도래할 것이니 경각심을 가지자는 의도 라기보단, 그저 밀양림이든 현실 세계든 어디든지 우리가 ‘선택’ 할 수 있다는 것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고 해석했다.
"이 우울을 너에게 남겨줄게"
극의 마지막 장면, 유울모의 할머니가 현실 세계에서 가져온 결혼반지를 유울모에게 건네주며 한 말이다. 많고 많은 것 중에 그 반지를 준 이유는, 그만큼 소중한 기억이 담긴 물건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유울모가 현실 세계에서 느꼈던 고독과 우울을 계속해서 떠올리게 되는 이유는, 그것 또한 스스로 선택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밀양림과 다르게 현실 세계에서는 우리가 선택한 모든 것이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순 없지만, 한가지의 정답이 아닌 다른 변수들을 마주하는 게 사람다움을 증명하는 일이라 아닐까 생각이 든다. 그래서 좀 더 덧붙이자면 결국 이 극은 밀양림 보다는 현실 세계의 편으로 조금 기울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건 우리는 삶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인간’ 이라는 사실이다.
아마도 할머니께서 남겨주신 우울의 반지는 밀양림에서 느낄 수 없는 자유의 색깔을 띠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기억하자. 우리가 소중히 여겨야할 자유이자 축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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