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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근 Nov 10. 2021

베로나에서

길을 잃은 채 한국소설을 읽다


줄리엣의 고향 베로나의 거리는 아레나 극장을 중심으로 뻗어 있었다. 아니, 차라리 모든 길들이 아레나 극장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길바닥에 촘촘히 박혀 있는 돌들 위로 무수한 관광객들의 발이, 또 그만큼 테라스 의자의 네 발이 서 있었다. 고대 제국의 건축물에 어느 르네상스 남녀의 비장미적 사랑이 겹쳐진 이곳은 오묘하게 생기로운 도시였다.



그 도시에서 나는 길을 잃은 채 홀로 헤매고 있었다. 베로나의 건물들은 지붕 색까지 똑같아 고즈넉한 일체감을 내뿜었지만, 길 잃은 이방인에게는 끝없이 이어지는 갈색 미로 속 정체감을 쏟아 냈다. 8월의 베로나는 그리 덥지 않았는데도 자꾸만 땀이 흘렀다. 폭염주의보도 아니었는데 나는 자꾸만 현기증이 났다. 한밤이었다면 오히려 가로등 빛을 따라 오페라의 아리아가 들리는 곳으로 향했을 테지만, 한낮의 베로나는 태양의 거대한 가로등 빛 아래 모든 곳이 밝았다. 모든 길이 밝아서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다 오른쪽 어깨 너머로 꽤 낯익은 기호가 눈에 스쳤다. 햇빛을 받아 더욱 반짝이는 노란색 m자, 맥도날드였다. 일말의 익숙함을 기대했으나 이곳도 모르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존재를 상상해 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 지구 먼 곳의 패스트푸드 가게에 가득하다는 사실이 숨을 턱 막았다. 늘어선 조명들로 실내는 눈부셨지만 나에겐 어두운 터널로 느껴졌다. 어느 추리 소설의 첫 장면 첫 희생양이 될 것만 같아, 나는 가장 싼 햄버거 세트를 황급히 받아 들고 바깥으로 나갔다.


실외 테라스에 다행히 자리 하나가 비어 있었다. 나는 검은색 철제 의자에 털썩 앉았다. 쿠션도 없는, 의도적으로 불편하게 설계된, 한쪽 다리가 짧아 이리저리 덜컹이는 의자. 그럼에도 내 자리는 여기밖에 없었다. 셰익스피어의 얼굴이 그려진 숄더백을 반항하듯 거칠게 올려놓았는데, 탁 소리와 함께 책 한 권이 밖으로 삐져나왔다 ─ 한강의 『채식주의자』. 내가 왜 이 책을 가져왔던가?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줄리엣의 고향 베로나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는 햄버거를 먹는 일, 그리고 한국소설을 읽는 일이었다. 나는 햄버거를 한 입 베어 물고는 책을 펼쳤다.


소설 속 여성은 불현듯 고기를 끊었다. 여성은 점점 식사마저 끊으려 했고, 마치 식물이 되려고 했다. 주변 사람들은 물론 부모도, 남편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소설 속 여성은 한 그루의 나무가 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음식을 기꺼이 토해 내는, 인간이길 부지런히 그만두려는 이 여성의 삶에 격한 이물감이 들었다. 그러나, 그래서 나는 역설적으로 안도감에 조금씩 빠져들었다. 소설 속 세계가 너무나 이질적이어서 오히려 더 빠른 속도로 그 세계의 한복판으로 자유 낙하하기 시작했다.


이탈리아어와 영어가 거리를 둘러싼 실재의 세계에서 나는 한글로 촘촘히 직조된 허구의 세계에 몰입하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실재의 세계에서 내가 느낀 낯섦과 두려움보다 허구의 세계에서 이 여성이 느끼는 낯섦과 두려움이 더 가깝게 느껴졌다. 이 감각은 나를 1인칭 주인공 시점에서 들어내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던져 내었다. 나는 서서히 나로부터 멀어졌다. 이탈리아의 어느 패스트푸드 가게에서 홀로 한국소설을 읽는 사람이 멀리서 보였다. 그는 사실 추리 소설이 아니라 서정 소설의 한 장면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오묘하게 생기로운 도시, 바로 이곳 베로나에서. 그가 앉은 의자는 더 이상 덜컹이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베로나도 셰익스피어가 만든 허구의 세계였다. 줄리엣의 무덤이 진짜가 아니지만, 가짜도 아니듯이. 소설 속 여성은 정말로 나무가 되었을까? 나는 소설의 마지막쯤 책을 덮었다. 그녀가 타인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로운 존재가 되는 결말을 마음껏 상상하고 싶었기에. 그리고 나도 베로나의 거리를 좀 더 걸어 보기로 마음먹었다. 날씨는 보다 더워졌고 해는 아직 지붕 위에 솟아 있지만, 모든 길이 밝아서 나는 어디로든 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 여정의 결말은 아직 쓰이지 않았으니까. 남은 햄버거를 천천히 다 먹은 뒤 다시 길을 나섰다. 숄더백 속 책이 아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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