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Kant Aug 19. 2024

계획없이 차를 몰다

누군가에게 버림받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며 그를 버리는 상상을 했다





가는 길은 단조로웠고 자꾸만 속도를 높이게 됐다. 서두르지 않아도 될 길이었지만 마음이 조급했다. 막상 도착했을땐 허무함과 막막함이 앞섰다. 식욕이 도는 것도 아니었고 만날 사람이 있는것도 아니었다. 강과 가까운 숙소를 잡은게 아니었지만 강은 숙소에서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에 있었다. 깍은듯 투박한 돌은 바다와 맞닿았다. 하늘은 점차 물들었고 나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해는 수평선 뒤로 넘어갔고 오늘 하루도 저물었다는 감각이 나를 짓눌렀다. 지나간 사람들이 생각났고 그들은 지금 내게 없었다. 아름다운 걸 보면 사진을 보내주고 싶었는데 보낼이가 없어 클래식FM의 #9310에 송신했다.

'오늘도 수고하셨습니다. 늘 하는 인사를 새삼스레 전합니다.'라고 답신이 왔다.


부안의 밤은 9시가 되자 짙은 어둠으로 덮였다. 갈 곳도 할 일도 있는게 아니라서 해안도로를 무작정 달렸다. 길은 크레파스로 흰 부분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빡빡하게 칠한 밀도여서 앞을 분간할 수 없었다. 지방의 해변에선 야외 스크린에 지나간 영화 상영제를 하고 있었다. 주최측은 여름밤의 낭만을 생각하며 기획했겠지만, 날이 습하고 모기가 발을 뜯었다. 누군가를 만나길 기대했지만, 누가 나를 쳐다보기만 해도 구역감이 들었다. 숙소로 돌아와 모래에 젖은 발을 씻으니 급격하게 졸음이 몰려왔다.




에어컨을 켜고 잤지만 송풍으로 계속 돌아가고 있었고 자꾸만 잠이 깼다. 선잠을 자다 아침에 일어나 돌리게 된 채널에선 인셉션이 나왔다. 이야기는 처음 보는 듯이 생경했고 배우들 또한 그들의 이름이 생각이 나지 않았다. 생각났던 건 팽이가 뱅글뱅글 도는 것뿐이었다. 기업을 상속받는 그가 '본인' 자신을 믿지 않아서 아버지가 (그를) 믿지 않았단 게 대사로 나왔다. 영화가 끝날 무렵엔 7월말 충동적으로 신청했던 블록체인 강의를 수강하였지만 1시간가량 뒤 머리가 아파 꺼버렸다. 퇴실할 땐 집에서처럼 강박적으로 정리하지 않아도 된다는게 좋았다.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 해수욕장의 모래, 정렬되지 않은 이불.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엔 카페를 들렀다. 빵을 먹을 생각이 없었는데 냄새 때문에 샀다. 따듯한 커피를 마셨더니 며칠간 소화되지 않던 음식이 서서히 내려가는 것 같았다. 엘베에서 마주친 여자아이는 나를 빤히 쳐다봤는데 의례적으로 웃어주는 그런 것도 하지 않았다. 단지 현실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날 괴롭게 했다. 카페 앞에는 격포항이 있어서 구경하러 나가려고 하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우산을 빌려 걸어가는데 축축함이 몸을 감쌌다. 습한 날씨에 어딜 더 방문하겠다는 생각도 버린 채 집으로 출발했다.


가는 길은 눈이 감겼다. 아침에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서인지 정신은 몽롱했고 졸음을 참으면서 운전하는 건 환각 같은 기분이었다. 쉼터에서 쪽잠을 청할 수도 있었지만 급히 가지 않아도 되는 길을 최단시간으로 돌파하려는 태도는 언제나 유효하다. 차로 180을 밟으면 그 순간에만 몰입할 수 있었다. 도착하려는 무렵 반납해야 할 책이 기억났고 행선지를 선회했으나 톨게이트로 빠지지 못해 결국 돌아갔다.


한낮의 열기는 도서관에 들어서자마자 냉기로 바뀌었다. 커피를 사니 사자마자 얼음이 급격하게 녹아 미지근해지는 날씨였다. 에세이 서가에 갔지만 빌리고 싶은 책은 단 한 권도 없었고 손이 가는 쪽은 심리나 철학이었다. 고독에 시달린 작가의 책이 주로 눈에 들어왔다. 이해되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책을 통해 알아보려는 내 습관은 여전했다. 저녁 시간이 가까워져 오고 있었고 2일이 되어서야 비운 속을 건강한 음식으로 채우고 싶었다. 청국장 가게에 갔더니 브레이크타임에 걸려 기다렸다 들어가야 했다. 주인은 5시 정각이 되어 문을 열어주었고 음식은 정갈했지만 그마저도 날씨가 너무 더워 미처 다 먹지 못했다.


집으로 돌아와서 샤워를 하고 깊은 잠에 들었다. 잠을 참아온 것의 대가였다. 깨어 불안의 서를 읽다 보니 밤이 되었다. 이미 저녁잠을 잤으니 잠드는 건 요원하려나. 비교를 그만두라는 책과 아이를 낳지 않는 삶에 대한 책을 읽었다. 누군가에게 버림받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며 그를 버리는 상상을 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반려동물 입양할까 말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