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드리비(Godrevy)
이전 포트리스(Portreath)에 대한 글에서 언급한 것처럼, 포트리스 주변으로 해안 절벽이 끝없이 이어진다. 그리고 해안 절벽 위에는 산책이나 트레킹할 수 있는 소로가 계속해서 이어진다. 그리고 여름에는 그 길을 따라 트레킹하는 사람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오늘 포스팅은 포트리스에서 남쪽으로 이어져서 고드리비(Godrevy)에 도달하는 해안절벽 산책로에 대한 이야기이다. 오늘도 역시 콘월의 아름다운 바다의 모습을 마음껏 볼 수 있다.
"오늘 산책의 시작은 '지옥의 입'에서 시작할거야."
"지옥의 입? 이름이 왜 그래?"
고드리비 해변에 가보는 것을 이야기할 때 짝꿍 아버지는 해안 절벽을 따라 걸어가는 것을 추천해주셨다. 물론 포트리스에서부터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중간까지 차를 타고 가다가 어느 지점부터 걷기 시작해서 고드리비 해변에 도착하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시작점으로 추천해 주신 곳의 이름이 지옥의 입(Hell's Mouth)였다. 실제로 이 이름은 구글지도에도 그대로 나와있고, 이 곳을 보기 위해 일부러 찾아오는 관광객이 있을 정도로 나름 알려진 장소이다. 왜 이런 이름이 붙은 것일까. 나와 짝꿍은 그 이름의 유래가 궁금했는데, 짝꿍의 아버지는 일단 가서 보라는 이야기만 남긴채 우리를 지옥의 입에 내려주셨다. 지옥의 입 근처에 주차장이 있어서 그곳에 차를 대로 지옥의 입이란 과연 어떤 모습일까를 상상하면서 그곳으로 다가갔다.
얼마 걷지 않아서 우리는 지옥의 입에 도착했다. 지옥의 입... 이름만 들으면 무시무시한 곳 같지만 우리가 받은 첫인상은 그저 평온하기만 한 콘월의 바다와, 바다를 따라 끊임없이 이어지는 해안절벽의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그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서 이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는데, 이곳에 왜 '지옥의 입'이라는 이름이 붙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절벽 아래로 내려가면 뭔가 이름에 걸맞는 모습이 펼쳐질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아쉽게도 아래로 내려가는 길이 따로 있지는 않았다. 짝꿍과 나는 그저 절벽 위에서 바라보는 모습에만 심취했고, 아름다운 콘월의 모습과 바다를 마음껏 바라보았다. 우리의 눈길이 닿는 곳에는 싱그럽고 영롱한 바다가 있었고, 밝은 기운 가득한 파란 하늘이 있었다. 그리고 녹색이 가득한 해안 절벽은 바다를 향해 돌진하는 것처럼 튀어나와 있었다.
그리고 짝꿍 아버지는 우리 곁으로 와서 한 마디를 건넸다.
"저 곳을 넘어가면 고드리비 해변이 보일거야."
'breathtaking.'
우리의 걷는 여정은 지옥의 입에서부터 시작이었다. 그리고 우리의 목적지는 고드리비 해변이었다. 출발하기 전에 짝꿍 아버지는 그렇게 멀지 않을 거라고, 아름다운 풍경을 보면서 걷다보면 금방 도착할 거라고 말씀해 주셨다. 그 이야기는 반만 사실이었다. 눈길 닿는 모든 곳이 너무도 절경이어서, 그곳에서 쉽사리 눈을 뗄 수 없었고 그렇게 감탄하고, 짝꿍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걷다보니 고드리비 해변에 도착하긴 했다. 다만, 그 거리가 '금방' 도착하는 거리는 아니었다. 중간에 사진도 찍고, 쉬엄쉬엄 가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총 2시간은 족히 걸은 듯 했다. 다만, 2시간을 걸었다고 해도 오르막 내리막이 이어지는 길이 아니라 절벽 위에 평탄하게 이어진 길을 걷는 거라서 힘들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 날의 너무도 맑은 하늘과 싱그러운 바다, 그리고 거친 해안 절벽이 만나서 만들어내는 하모니가 너무 절경이어서 이 풍경을 계속 볼 수 있다면 더 걷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걷는 동안 짝꿍이 내뱉은 나지막한 영어 한 마디가 이날 우리가 바라본 풍경을 고스란히 표현해 준다. 'breathtaking.' 숨이 턱 막힐 정도로 너무 아름답다는 뜻이다. 너무도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볼 때 말문이 막힌다는 표현을 우리도 많이 쓰는데, 그 의미의 영어표현인 셈이다. 그렇게 아름다운 자연의 일부가 되어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풍경이라는 선물과 자연의 기운을 끊임없이 받았들였다. 그 기운 덕분에 힘든 줄도 몰랐던 것이 아닐까. 실제로 이렇게 아름다운 자연 속에 일부가 되면, 무엇을 하더라도 평소보다 덜 힘들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자연이 기운을 북돋아 주는 것이다.
우리가 걷고 있는 이곳은 내셔널 트러스트(National Trust)로 지정된 곳이다. 영국 비영리기관인 내셔널 트러스트는 역사적, 환경적, 자연적 가치가 뛰어난 장소 또는 건물을 선정하여 관리하고 보존하여 이를 후대에 물려주기 위해 노력하는 곳이다. 정말 뛰어난 가치가 있는 곳은 유네스코(UNESCO)가 지정하지만, 그곳에 포함되지 못하더라도 어느 정도의 보존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곳은 내셔널 트러스트가 지정하는 것이다. 실제로 콘월을 여행하면서 내셔널 트러스트 로고를 정말 많이 마주쳤다. 그만큼 콘월은 아름다운 자연이 가득한 곳이다.
사실 콘월의 원주민들은 내셔널 트러스트로 지정되는 것을 그렇게 반가워하지는 않는다. 그들도 물론 콘월의 자연이 아름답게 보존되어야 한다는 사실에는 100% 공감한다. 다만, 이렇게 내셔널 트러스트로 지정되면 사람들에게 더 알려지면서 더 많은 관광객이 찾아올 것이고, 아무리 보존을 잘 한다 한들 사람들이 몰리면 그곳의 자연은 훼손되기 마련이다.
"자연을 가장 잘 보존하는 방법은 자연을 그대로 놔두는 것이야."
그리고 또 한가지는 주차 문제이다. 예전에는 어디를 가더라도 쉽게 무료로 주차할 수 있었는데, 내셔널 트러스트로 지정된 이후로는 이 장소에 갈 때마다 소정의 주차비를 지불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이 비용은 이 장소를 관리하고 보존하는 데 사용되긴 하겠지만, 아무래도 그들의 주머니에서 이전에는 쓸 필요가 없었던 돈이 빠져나가다 보니까 현실적으로 더 깊게 체감하는 셈이다.
조금 더 걸어가니까 저 멀리 등대가 보이기 시작했다. 고드리비 등대는 바다 쪽으로 툭 튀어나와 있는 작은 반도 앞에 자그마한 섬 위에 서있었다. 사실 우리나라도 등대가 워낙 흔해서 등대 그 자체로는 특별한 감정이 들지 않았는데, 바다 위에 홀로 서있는 등대를 보고 있으려니 문득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온갖 풍파를 누구의 도움 없이 오롯이 견뎌내야 하고 그런 역경을 넘어 빛을 내뿜어서 주변을 항해하는 배에게 길을 안내하는 길잡이 역할을 하는 등대가 문득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생명이 있는 존재가 아닌, 인간이 만들어낸 일종의 건축물일 뿐이지만 이런 생각이 떠오르게 만드는 데는 생명의 존재 유무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고드리비 등대와 가장 가까운 곳까지 다가가면 넓찍한 잔디밭이 나온다. 우리는 그곳에 잠시 앉아 휴식을 취했다. 서두를 이유도 없었고, 그곳에서 따뜻한 햇살을 마음껏 만끽했다. 영국에서 이런 햇살을 마주하는 것은 참 귀한 경험이라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는데, 문득 생각해보니까 콘월에 도착한 이후로 단 하루도 햇빛이 나지 않은 날이 없었다. 짝꿍과 함께, '우리는 참 축복 받았나봐'라는 이야기를 수도 없이 나눴다. 바다에서 살랑이 불어오는 바람은 우리가 더욱 편안하게 쉴 수 있게 해주었다. 이날, 고드리비 등대 앞에서 온 몸으로 느꼈던 콘월의 바다바람은 더할나위 없이 시원했고 상쾌했다.
조금 더 가니까 고드리비 해변이 나타났다. 사실 고드리비 해변의 이름은 따로 있는데(그위티안 해변; Gwithian Beach), 이곳이 고드리비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고드리비 해변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고드리비 해변은 멀리서 볼 때부터 모래사장이 정말 크다고 생각했다. 포트리스의 작고 아담한 해변을 보다가 와서 그런지는 몰라도, 바로 앞에서 고드리비 해변을 바라보니까 더욱 크게 느껴졌다. 고드리비 해변에 도착하기 전부터 해변에 사람이 많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주차장이 그렇게 작지는 않은데, 그곳이 차로 가득차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도착한 고드리비 해변에는 역시나 사람이 꽤 많았다. 그럼에도 해변의 규모가 워낙 커서 그런지, 사람으로 빼곡하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듬성듬성 빈자리도 많이 보이고, 주차장에서 조금만 멀어지면 오히려 한적한 해변이 나왔다.
영국답지 않게 화창하고 조금은 더웠던 여름날씨였다. 그래서인지 바다 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도 꽤 많았고, 해변 위에 누워서 일광욕을 즐기는 사람도 있었다. 아이들은 모래 위에 앉아서 신나게 모래놀이를 하고, 야트막한 절벽 위에 올라가 다이빙을 즐기는 젊은이들도 있었다. 모두 저마다의 방식으로 휴식을 취하고 즐거움을 찾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나와 짝꿍은 보드라운 모래의 감촉을 맨발로 느끼면서, 중간중간 시원한 바닷물을 밟기도 하면서 모래사장 위를 정처없이 걸었다. 바다를 좋아하는 짝꿍이 바다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했지만, 맨발에 닿은 바닷물이 꽤나 차가워서 쉽사리 용기를 내지는 못했다. 무엇보다 수건이나 여벌 옷을 준비하지 않아서 바다에 들어갔다 나온 후에 뒷처리가 쉽지 않을 것 같아 마음을 접었다. 그리고 바다 안에 들어가서 자유롭게 노니는 사람들을 조금은 부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고드리비 해변에서 얼마나 시간을 보냈을까. 문득 우리는 배가 고파지고 목이 마르기 시작했다. 그래서 주변에 마실 거나 먹을 거를 살만한 장소를 열심히 찾았는데, 그런 장소가 전혀 없었다. 카페도 없고, 식당도 없었다. 해변에 조금 더 머물면서 여유로운 시간을 만끽하고 싶었는데, 어쩔 수 없이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 온 것이다. 그래도 나름 콘월에서 꽤 유명한 해변인데, 주변에 편의시설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우리는 해변을 조금 더 걷다가 떠나기 싫은 마음을 겨우 억누르고 해변을 빠져나왔다. 차로 돌아가는 시간과, 집까지 가서 저녁을 준비해야 하는 시간까지 생각하면 사실 조금 더 빨리 해변을 떠났어야 했다. 하지만 앞에서 계속 언급한 것처럼 영국에서 이렇게 화창한 날씨를 또 언제 만날지 모르기 때문에, 당장 내일부터 주구장창 비만 올 가능성도 농후하기 때문에 파란 하늘이 가득한 날을 마음껏 즐겨야만 했다.
이렇게 우리는 집으로 돌아왔다. 나와 짝꿍, 그리고 짝꿍의 아버지가 함께했던 지옥의 입에서부터 고드리비 해변까지 이어진 여정이 끝났다. 포트리스 마을에서 해안절벽을 걸을 때와 비슷하게, 말문이 막힐 정도로 경이로운 자연의 모습을 끊임없이 보면서 걸었던 길이었다.
"내년에 콘월에 다시 오게 되면, 이 길을 다시 걷고 싶을까?"
"응! 단, 날씨가 오늘처럼 맑아야 돼."
우리는 잠시 내년에 이 길을 다시 걷게 되기를 희망했다. 그 바람이 이뤄지기를, 그리고 우리가 함께 걸었던 이 길 위에서 새로운 이야기가 이어지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