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란포스(Perranporth)
"여기 근처에 유명한 펍 하나 있는데, 가볼까?"
"좋아요!"
짝꿍 아버지가 어느 날 펍에 같이 가자고 했다. 맥주도 좋아하고 펍도 좋아하는 내가 마다할 이유가 있으랴. 우리는 당연히 짝꿍 아버지를 따라 나섰고, 그렇게 우리가 도착한 곳은 포트리스(Portreath)에서 약 20~30분 정도 떨어진 작은 동네, 페란포스(Perranporth)였다. 콘월의 여느 작은 바닷가 마을과 별반 다를게 없어 보이는 이 동네에 대한 이야기를 오늘 해보려고 한다.
팔모스(Falmouth)를 다녀온 어느 날,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집에 와서 저녁을 먹었다. 저녁을 먹은 후에 티비를 보는데 짝꿍 아버지가 무심히 펍에 가보자는 제안을 하셨다. 동네에 있는 펍은 이미 다녀온 적이 있어서 같은 펍에 가나보다 했는데, 다른 동네로 가야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 펍이 콘월에서는 나름 유명하고, 날씨가 좋은 날에는 사람들로 붐비는 펍이라고도 했다. 그런 펍을 마다할 이유가 과연 있을까. 우리는 당연히 'yes'를 외쳤고, 이미 외출하고 돌아온 뒤라서 나갈 준비도 딱히 필요하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바로 집을 나섰고, 다른 동네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짝꿍 아버지는 학교를 같이 다녔던 동네 친구 한 명도 함께 가자고 했다. 그렇게 우리 네명은 포트리스(Portreath)에서 약 20~30분 정도 떨어진 작은 동네, 페란포스에 도착했다.
오는 길에 페란포스란 동네에 대해서 간략하게 설명을 들었다. 괜찮은 피시앤칩스 전문점이 한두개 정도 있고, 펍도 두세개 정도 있는 아주 작은 바닷가 동네라고 했는데, 도착해서 보니까 실제로 아담한 규모의 동네였다. 포트리스보다 작으면 작았지 결코 크지는 않은 것 같았는데, 이렇게 작은 동네에 사람들이 일부러 찾아오는 펍이 있다고 하니까 다소 이외였다. 일단 펍에 가기 전에 동네를 잠깐 둘러봤는데, 동네가 워낙 작아서 다 둘러보는데 얼마 걸리지도 않았다. 길을 걷다가 사람들이 줄 서서 뭔가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봤는데, 바로 피시앤칩스 포장 전문점이었다. 오는 길에 설명을 들었던 괜찮은 피시앤칩스 전문점이 여기인가보다 생각해서 우리도 하나 주문해서 먹어볼까 했는데, 아쉽게도 재료가 다 떨어졌다고 한다. 아쉬운 마음 가득 머금은 채 발길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페란포스 동네를 구경하다가 동네 한복판에서 작은 연못을 발견했다. 연못은 마을의 집들로 둘러싸여 있어서 멀리서 볼 때는 잘 안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서 연못이 있는 공원으로 들어서면 그제서야 그 모습을 드러낸다. 페란포스 마을처럼 아담한 규모의 이 연못의 이름은 페란포스 보팅 연못(Perranporth Boating Lake)이다. 해질녘 즈음 연못에 다다르자 화려하게 피어난 꽃들이 먼저 우리를 반겨주고, 조금 더 들어가면 연못 위에서 한가롭고 자유로이 헤엄치며 놀고 있는 오리들이 우리에게 인사를 건넸다. 연못 위에서 놀고 있는 오리가 전부인 줄 알았는데, 공원 길을 조금 더 따라가니까 길가에 편안하게 쉬고 있는 오리들이 정말 많았다. 공원을 한 바퀴 돌고 싶었는데, 편안하게 자고 있는 오리들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그냥 우리가 있는 그 자리에서 연못을 감상했다.
페란포스의 이 작은 연못은 참으로 고즈넉하면서도 아늑했다. 연못을 둘러싸고 있는 집들이 병풍처럼 든든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어서 연못이 더욱 잔잔하고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간혹 들려오는 오리의 울음소리만 정막을 깰 뿐, 이 연못에서 다른 소리는 전혀 들려오지 않았다. 그러한 정막을 깨고 싶지 않았서 우리는 말소리를 최대한 낮춘 상태로 이야기를 나눴다. 주변에 아무도 없었고,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되는 개방된 공간이었지만 그 분위기를 우리의 목소리로 망치고 싶지 않았다. 근처에 벤치가 있어서 잠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서로 약속이나 한 것처럼 우리는 잠시동안 침묵했다. 그리고 이 공원과 연못에서 들려오는 자연의 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일 뿐이었다. 펍에 가려고 온 이 동네에서 잠시나마 자연이 주는 편안하고 아늑한 기분을 만끽했던 시간이었다.
"이제 펍에 가볼까?"
그리고 나서 우리는 펍을 가기 위해 공원을 나왔다. 펍에 가자는 말과 함께 짝꿍 아버지는 우리를 해변으로 데리고 가셨다. 펍에 간다고 했는데 왜 해변으로 가는지 살짝 의문이 들긴 했지만 묻지 않고 뒤를 따라갔다. 그 때만 해도 그저 페란포스의 해변을 보여주고 싶어서 우리를 이곳으로 데리고 오신 줄만 알았다. 실제로 페란포스의 해변은 정말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아무리 펍에 가고 싶은 마음이 크다고 한들, 이런 경이로운 자연의 아름다움을 외면하면서까지 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또 다시 발길을 멈춰 세웠다. 붉은 노을이 지는 태양과 하늘을 페란포스 해변에서 바라보았다. 썰물 시간이라 물이 정말 많이 빠져 있었는데, 그로 인해 갯벌에 자연스레 난 물길이 자연의 멋을 더해주었다. 너무도 아름다운 모습에 그저 할말을 잃은 채 바라만 볼 뿐, 다른 행동은 할 수가 없었다.
물이 많이 빠져서 저 멀리 보이는 바닷물과 그 언저리에서 놀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그 중간에 우뚝 솟아있는 거대한 바위가 페란포스 해변의 풍경을 그려내고 있었다. 물이 가득 차면 멀리 보이는 바위가 섬이 되는데, 그 때는 그곳까지 수영으로 가려는 사람, 또는 바위에서 다이빙을 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다고 한다. 물론 아주 위험하고 미친 짓이라고 짝꿍과 짝꿍 아버지는 입을 모아 말하지만, 위험을 생각하지 않고 그런 행위를 하는 사람들은 항상 있기 마련이다. 실제로 그런 모험(이 아니라 위험)을 하다가 사망한 사람도 적어도 매년 한두명씩은 꼭 나온다고 한다. 위험과 모험을 꼭 구분했으면 좋겠다. 우리는 바위 근처로 가보지는 않았는데, 멀리서 바라보는 바위는 그 자체로 아주 웅장했고 위엄이 넘쳤다. 그리고 해변 양 옆으로 길게 뻗어있는 절벽은 페란포스 해변을 포근하게 감싸주고 있었고, 그 위에는 집들이 있었는데 그 집들은 대부분 외국인(콘월 사람들이 콘월 외부에 사는 영국인을 일컫는 말)들이 휴가를 위해 소유하고 있는 별장이라고 한다.
"그나저나 펍은 언제 가요?"
이쯤 되니 우리가 이곳에 온 목적이 펍인지 해변인지 혼동되기 시작했다. 짝꿍 아버지가 우리에게 소개해 주려는 펍이 어디인지 아직 감도 오지 않았다. 도대체 어디에 있길래 그렇게 유명한 것인지, 그리고 얼마나 유명하면 이렇게 작은 시골 동네까지 사람들이 일부러 찾아오는 것인지 더욱 궁금해졌다. 해변을 다 보고 그제서야 우리는 정말로 펍으로 향했다. 펍을 간다고 해서 마을 중심부로 돌아갈 줄 알았는데, 짝꿍 아버지는 해변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왜 해변을 따라 계속 가는거지?'라는 의문이 생길 때쯤, 짝꿍 아버지가 펍을 가리켰다. 그리고 그 펍은 해변 한가운데 모래사장 위에 있었다. 순간 거짓말인 줄 알았는데,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니까 진짜 펍이었다. 주변에 아무런 건물도 없고, 심지어 바닥도 모래인 이곳에 펍이 있을 줄이야. 전혀 예상하지도 못했던 펍의 위치였다. 신기하면서도 재밌었다. 그렇게 우리는 펍 안으로 들어섰다.
"여기에서 주말에 공연을 하는데, 그 때는 자리가 없어서 못와."
해변 위에 있는 펍의 이름은 워터링 홀(Watering Hole)이다. 펍 안으로 들어섰는데, 그 규모에 다시 한 번 놀랐다. 이 펍의 내부는 정말 컸는데, 외부 자리까지 있어서 전체적으로 꽤 많은 좌석이 있었다. 그런데 짝꿍 아버지는 거의 매주 금요일이나 토요일에 이곳에서 라이브 밴드 공연을 하는데, 그 때는 정말 많은 사람이 찾아온다고 한다. 우리는 맥주를 받아서 야외 테이블에 앉았다. 이날 날씨가 좋긴 했지만, 바람이 많이 불고 살짝 쌀쌀한 날씨 탓에 펍에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특히 야외 테이블은 거의 비어있어서, 우리가 독점하다시피 했다. 야외 테이블에서 보는 풍경은 가히 일품이었다. 비로소 왜 콘월 사람들이 이 펍을 일부러 찾아오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야외에 앉아있는 것이 조금 춥긴 했지만 이런 풍경을 보면서 맥주를 마실 수 있는데, 추위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런 풍경을 보면서 모래 위에서 마시는 맥주 한 모금은 너무 시원하면서도 맛있었다. 이 풍경이 맥주의 맛을 한 단계 올려놓았다.
"밀물 때는 우리 코앞까지 물이 들어와."
우리는 펍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짝꿍의 아버지와 그의 친구의 학창 시절 이야기, 짝꿍의 어린 시절 이야기, 나와 짝꿍의 이야기, 콘월, 영국, 한국에 대한 이야기 등 이야기 주제는 차고 넘쳤다. 무엇보다 영국의 과거 이야기를 듣는 것이 나에게는 매우 흥미로운 주제였다. 이제는 60대가 된 세대가 70년대, 80년대에 어떻게 지냈는지를 짝꿍의 아버지과 그의 친구가 아주 생생하게 들려주었고, 그들의 이야기는 교과서에서 배우는 내용이 아니라 실제 사람들이 살아왔던 이야기이기에 피부에 더 와닿았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나라와는 달랐던 시대적 상황을 이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디서나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는 비슷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이 살아왔던 이야기가 우리의 어린 시절과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도 우리의 시선은 해변과 바다를 향해 있었다. 여름에는 해가 워낙 늦게 지는 영국이라, 이 때 시간이 저녁 8시가 넘었는데도 해가 아직도 하늘에 걸려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바다 너머 노을지는 아름다운 하늘을 더 오래도록 볼 수 있었다. 이 때는 썰물 시간이라 물이 완전히 빠져 있었는데 밀물 때는 펍 바로 앞까지 물이 들어온다고 한다. 예전에 한 여행객이 물이 차오르는 것을 보고 고립될까봐 맥주를 황급하게 다 마시고 서둘러서 펍을 빠져나갔다는 에피소드를 짝꿍 아버지가 들려주셨다. 밀물과 썰물과 상관없는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다소 당황할 수도 있을 듯했다. 저 멀리 있는 바닷물이 어느새 보면 바로 앞까지 들어와있으니, 이 물이 어디까지 들어올지 예상할 수 없을테니 말이다. 문득 밀물일 때는 바닷물에 발을 첨벙거리면서 맥주를 마실 수 있는 것일까 궁금했다. 밀물 시간에 펍을 다시 한 번 가보고 싶었는데, 그 바람은 생각으로만 남게 되었다. 다음에 콘월을 가게 되면 밀물 시간에 이 펍을 한번 가봐야겠다.
해가 수평선을 넘어가고 어두워지고 나서야 우리는 펍을 나섰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갔던 이날의 저녁 모임은 아주 뜻깊은 시간이었다. 내가 영국을 조금 더 이해하고, 그들에게 한국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했다. 맥주 한 잔 곁들이며 좋은 사람들과 스스럼 없이 대화할 수 있었던 그 시간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듯하다. 그리고 그 기억 한 켠에는 페란포스의 아름다운 풍경이 항상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