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예수님을 빼돌렸습니다

부활하신, 승리자 예수 그리스도

by 노에시스
요한복음 20:1~10[200주년 신약성서]
20:1 주간 첫날, 아직 어두운 새벽에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무덤으로 가서 보니 무덤에서 돌이 이미 치워져 있었다.
20:2 그래서 그는 달음질쳐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다른 제자에게로 가서 알렸다. "(사람들이) 무덤에서 주님을 빼돌렸습니다. 그분을 어디에다 (옮겨) 놓았는지 모르겠습니다."
20:3 그래서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는 나와서 무덤으로 갔다.
20:4 둘은 같이 달렸는데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앞서 달려 먼저 무덤으로 갔다.
20:5 그러고는 꾸부리어 염포가 놓여 있는 것을 들여다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않았다.
20:6 그러자 시몬 베드로도 그를 뒤 따라와서 무덤으로 들어가 염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20:7 또한 그분의 머리를 덮었던 수건은 염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 곳에 개켜져 있었다.
20:8 그제야 무덤에 먼저 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와서는 보고 믿었다.
20:9 사실 그들은 아직도 그분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만 한다는 성경(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20:10 그래서 제자들은 다시 자기들의 (집)으로 물러갔다.




“내란은 종식되지 못하고 지금도 계속됩니다. 더 통탄할 일은 그 끔찍한 내란 상태의 중심에 기독교가 불쏘시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쩌다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극우적 망령에 사로잡힌 괴물이 되어버렸습니까?”



최근에 극우 기독교에 맞서는 반성을 촉구하는 교계 움직임이 포착되고 있습니다. 이제 한국교회 내에 장기적인 분열과 대립의 우려보다 더 극우화되어가는 교회의 병적인 상태가 더 우려되기 때문에 행동에 나선 것 같습니다.



극우화된 기독교 세력이 내란 종식을 막아서고 있습니다. 진실과 정의에 앞장서야 할 교회가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거짓된 내용으로 국민을 불안에 빠트리고 호도하며 나라를 위태롭게 만들고 있습니다.



극우 기독교 세력은 “국민저항권이야!”라고 외치며 법원 건물을 부수던 폭도들 만들어낸 근원지기도 합니다. 그들에게는 가짜뉴스와 사실을 분간할 능력과 의지조차 없습니다. 민주주의의 질서를 무시한 채, 오직 극우적 망령에 사로잡혀서 허상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저는 너무나도 괴롭습니다. 그들과 이미 대화할 수 없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무엇이 그들을 저렇게 만들었을까, 나는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어지는 모든 물음에 답을 찾으려고 할수록 무력감을 느낍니다. 그들을 보고 있으면 같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이 수치스럽기까지 합니다. 저는 그러한 행태에서 그들이 예수님을 빼돌렸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2절, 그래서 그는 달음질쳐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다른 제자에게로 가서 알렸다. "(사람들이) 무덤에서 주님을 빼돌렸습니다. 그분을 어디에다 (옮겨) 놓았는지 모르겠습니다."



무덤인 빈 것을 보고 마리아는 베드로와 요한에게 “누군가 예수님을 무덤에서 빼돌렸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마리아의 이 첫 문장 때문에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님이 부활하실 거란 말씀을 떠올리지 못하게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깜짝 놀란 상황을 보고 내뱉은 말로 다른 이들에 오해를 제공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세상의 모든 것들을 포괄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었습니다.



무덤 사건을 두고 수많은 사람이 예수의 부활을 의심해왔습니다. 원래 예수님은 부활한 게 아니라, 정말 제자 중 누군가 예수님의 시체를 몰래 빼돌려서 부활로 꾸민 것이라고. 마태복음 28장 12~15절에는 이런 의심을 거짓말로 만든 원로들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독자가 당연히 의심할 것을 알고 역으로 뒤집었다는 주장은, 19세기 독일의 신학자 다비트 슈트라우스의 주장이기도 합니다.



슈트라우스는 예수의 부활을 부정합니다. 그는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신화에 불과하고 예수는 하늘에서 온 자가 아니라, 어느 인간과 다를 바 없는 인간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결과적으로 예수에 관한 신학적 연구를 더 풍성하게 만들었습니다. 역사비평을 통한 역사적 예수를 추적하는 연구가 그로부터 시작되었고, 역사적 예수와 신앙적 예수를 구분 짓는 기준을 처음으로 제시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 신앙을 공격하여 결과적으로 더 나은 길로 이끈 비슷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중에 대표적으로 니체의 초인사상은 근대에서 현대신학으로 넘어가는 문을 열어주었고, 다윈의 진화론도 성서가 담고 있는 깊은 차원의 생명과 자연에 대한 이해 지평을 열어주었습니다.



저는 신학을 공부하면서 많은 생각들이 깨지고 큰 충격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예수님을 믿고 있는 것을 보면, 적어도 제 안에서 예수님은 존재를 부정당할 수 없는 참된 주님이셨고 주님이십니다.



9절, 사실 그들은 아직도 그분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만 한다는 성경(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10절, 그래서 제자들은 다시 자기들의 (집)으로 물러갔다.



마리아의 말은 제자들을 각자의 집으로 이끌었습니다. 텅 빈 무덤처럼 제자들의 마음에는 깊은 근심과 공허가 찾아들었습니다.



예수님은 누군가 빼돌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니까 죽음이 머물던 무덤도 텅 빌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채우기 위해서는 언제나 비움이 필요한 법입니다. 자연도 이와 같은 이치로 흘러갑니다. 검은 먹구름 뒤에는 세상을 맑고 밝게 비출 태양이 숨겨져 있는 법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그 모든 흐름을 예측하지 못하고 파악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현재를 사는 존재입니다. 당장 내일도 어떨지 모르는 특성 때문에, 불안하기도 하지만 기대가 되기도 합니다.



극우화 되어가는 한국교회의 토양에도 하나님이 계획하신 역사가 이루어져 갈 줄을 믿습니다. 그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예측하지 못하는 기쁨과 소망의 길이 될 것입니다. 또한 빛으로 임하시는 주님은 세상의 어둠을 몰아내고, 악으로부터 우리를 최후 승리로 이끄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죽음에서, 온갖 의심 속에서, 부정과 오해 속에서도,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담대하게 그 부활의 증인 된 삶으로 나아갑시다.